<시계방향> 이인범, 이영철, 최열, 박천남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이 안고 있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최근 들어 국공립미술관들은 존립 이유조차 망각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는 대한민국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이인범 상명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박천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미술평론가 최열씨가 한국 국공립미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이인범ㅣ정부 수립 이후 첫 국공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을 설립한 것은 1969년인데 ‘국전’을 효율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미술작품 조사 연구, 컬렉션, 교육 같은 미술관 고유의 활동이 아니라 ‘국전’이라는 전근대적인 전시 개최 대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국립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뿐인 이 미술관의 태생부터 그러니 이후 우리나라 미술관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박천남ㅣ국내 국공립미술관의 기능이 전시 행사 위주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해외 선진 미술관의 패러다임은 공급자 중심에서 이용자 중심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인범ㅣ루브르미술관이 프랑스대혁명의 결과물이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혁명과정에서 1793년 개관한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근대국가체제 성립 주체인 시민 부르주아지들이 부르봉 왕가의 컬렉션을 개방하여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니 전시를 통해 국민의식을 나누는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장소와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비껴갈 수 없는 것은 방대한 컬렉션이다. 반면 우리는 컬렉션 없이 과시적인 전시에만 골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영철ㅣ독일에서는 컬렉션 중심의 미술관과 전시 중심의 미술관이 구분되어 있다. 쿤스트할레(Kunsthalle)는 공공 미술관이지만 작품 컬렉션을 하지 않는다. 어쭙잖은 컬렉션은 미술관의 골칫덩이 문제를 안겨준다. 나중을 생각해서 아예 작품을 구입하지도 말고 기증을 받지도 않는 미술관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인범ㅣ박물관과 미술관을 달리 생각하는 우리의 언어 습관부터 재고해봐야 한다. 뮤지엄 제도를 옛 물건들을 다루는 박물관과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 과정에서 하나의 이념이 된 ‘미술’을 취급하는 미술관으로 나눈 것은 일본인들이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의 과거를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문화적 지체현상으로 간주하게 하고, 우리의 미래가 서구화를 통해서만 열릴 것이라는 생각에 물들게 한다. 그런 점에서 문화식민주의의 찌꺼기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이영철ㅣ그게 바뀌려면 물건 중심에서 사건 중심으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심으로,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오늘과 과거를 해석하는 아트 뮤지엄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에서 박물관은 고상한 무덤이고 미술관은 박물관의 정지된 시간지층을 뚫지 못하고 있다.

최열ㅣ나 역시 용어를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연사를 다루는 뮤지엄을 자연사박물관이라고 하는 것처럼 미술품을 다루는 뮤지엄은 미술박물관으로 불러야 한다. 즉 국립현대미술관을 국립현대미술박물관 같은 식으로 불러야 한다.

이인범ㅣ루브르가 프랑스대혁명의 결과물이라면, 퐁피두센터는 1968년 파리 5월 봉기의 산물이다. 루브르미술관 체제가 새로운 미적 소통이나 창의력과 상상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자기반성 속에 프랑스 국민들이 새로 혁신해낸 뮤지엄 시스템이 퐁피두센터다. 뮤지엄 제도 자체는 이렇듯이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역동적으로 운동 변화해왔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근대적 의미의 미술관 제도를 정착하는 일에도 힘겨워하는 상황이다.

최열ㅣ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은 덕수궁분관을 포함해 모두 100명이다. 그중 학예사(큐레이터)는 18명이고 나머지는 행정직이다. 국립미술관에 미술전문직이 18%밖에 안 된다는 것은 심각한 결함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혁신과 개혁을 외치면서 개악을 했다는 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기본적인 틀을 책임운영기관으로 바꿨는데 이게 넌센스다. 그 직전까지는 전임 관장의 의지에 따라 학예사 중심으로 운영해왔는데 이게 다시 행정직 중심으로 바뀌었고 실제로 관료예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화관광부의 미술관 담당 부서가 미술관을 평가하고 감독한다. 또 미술관장 밑에 학예사와 행정직이 있는데 학예사가 행정직의 밑에 들어가 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병원에서 의사가 행정직의 관리감독을 받는 꼴이다.

박천남ㅣ큐레이터십 못지않게 이른바 디렉터십도 매우 중요하다. 건강한 큐레이터십은 올바른 디렉터십으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인범ㅣ누가 뭐래도 뮤지엄의 일차적인 목표는 이미 생산된 작품의 가치를 수집·보존·해석·전시·교육하며,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소통을 일궈내고자 설립하는 기구다. 미술관의 기본 활동에도 소홀한 채 미술관들이 여기저기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한다든가, 미술은행제도 같은 예술가 지원 역할을 자처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대단히 파행적인 것이다. 문광부의 예술정책국이나 문화예술위원회 기능과 혼돈하여 미술관을 현장의 미술문화 진흥이라는 미명 아래 정권이나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근본을 망각한 이런 일들이 관장이나 큐레이터를 정치적 헤게모니를 쥔 이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마구잡이로 임명하고 뺏는 엽관주의식 인사의 빌미가 된다.

최열ㅣ이명박 정권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외국인을 포함해 폭넓게 개방해야 한다. 문광부 장관이 미술관 경영과 아무 관계없이 단지 미술계에서 자기편이라는 이유로 관장으로 선임하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이영철ㅣ한국사회는 이미 탈근대사회로 진입했으나 미술관을 둘러싼 의식은 근대 이전 수준이다. 탈산업화, 정보화, 국제화, 세계화와 같은 현실적 변화 요구에 부응하려면 미술관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만나야 한다. 산업시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미래 비전에서 멀다. 30~40대 젊은 인력이 미술관을 움직이는 실질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인범ㅣ우선 근대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분리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할 때가 되었다. 퐁피두센터를 루브르박물관과 새로운 관점에서 디자인했듯이 말이다.

최열ㅣ근래 국공립미술관이 상업적 목적의 전시를 위한 대관 전시장으로 전락한 것도 매우 심각한 사태다.

박천남ㅣ최근 유행하고 있는 상업적 목적의 전시가 반드시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되는지와 그 기획과정에 대한 꼼꼼한 반성과 점검이 필요한 때다. 사실 전국적으로 공립미술관이 여럿 생겨났지만, 건강한 미술관 문화를 보이는 곳은 많지 않다. 일본은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가져오면 대부분 전국 순회를 한다. 크건 작건 그만큼 제대로 된 미술관이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역 공립미술관은 그러한 전시를 수행할 만한 보안이나 시설 및 이런저런 문화가 대여 측의 요구사항에 부합하지 않아 순회전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미술관을 건립할 때는 이런 문제, 이를테면 국제적인 시설보고서 양식을 충족하는 미술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공립미술관이 블록버스터 전시를 주최할 때, 그 전시의 기획이 미술관 내부의 전문 인력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는 업무를 명확히 분장하여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이 문제라면, 전시기획과 구성 즉 큐레이팅은 미술관이 맡고 예산은 다른 곳 예컨대 공동주최자 측과 함께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철ㅣ자체 기획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1년 단위 회계연도로 기획해야 하는 것은 모순이다. 내용 있는 대규모 전시를 기획하려면 최소한 2, 3년이 소요되는데 국공립 미술관장의 임기는 3년이다. 앞을 내다보며 뭔가기획하기가 시스템 상 불가능하다.

박천남ㅣ국공립미술관 내에 이와 관련한 조례를 제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모든 블록버스터 전시를 미술관이 다 기획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외부의 우수한 기획에 대해, 또는 게스트 큐레이터에게 전시 기회를 제한적으로 주는 것도 공립의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횟수 제한과 내용 검토에 대한 내부의 엄격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기획사나 언론에 의한 대형 전시가 이어지면서 미술관 내부 전문인력인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는 취소되거나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등 고유 기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인범ㅣ좋은 미술관 제도는 그 운영을 책임질 전문가 집단에 대한 고려 없이는 결코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미술관들이 처한 현실적인 위기는 전문가 집단을 비정규직화하고 운영 주체에서 소외시키는 데 그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학예사들 대다수가 계약직이다. 미술관 운영의 핵심적인 주체가 되어야 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마저 그렇고 계약기간은 고작해야 2년이다. 자기가 기획한 전시 하나 실현시킬 수 없는 기간이다. 제아무리 신자유주의적인 발상법이 휩쓰는 세상이라도 미술관 기능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라도 있었다면 이런 몰상식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천남ㅣ상당수 지역 공립미술관의 학예연구실장 임기가 1년이다. 이른바 전문계약직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계약직 큐레이터도 마찬가지다. 모집 시 임기가 1년으로 제한되고 근무실적에 따라 5년 범위 내에서 연장 가능이란 조항이 따라붙기도 한다.

이영철ㅣ1년마다 계약을 다시 하는 것은 전문 인력을 사회 통제 시스템의 노예로 만드는 일이다. 그 안에서 행정권력의 온갖 조잡한 횡포가 있다. 홍보와 관객 수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한국에서 문화는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고 거품이다.

박천남ㅣ학예연구사 출신이 학예연구실장이 되어야 하고 미술관 실무 경험이 풍부한 학예연구실장, 혹은 학예연구관 출신이 훗날 관장이 되어야 한다.

이영철ㅣ국공립 현대미술관의 관장직이 교수 출신의 노회한 작가들을 위한 명예직 처럼 이용되는 건 정말 곤란하다. 현장에 어두운 무능한 이론가들을 위한 자리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인범ㅣ관장 임면권을 누가 가져야 하는지는 미술관 조직의 핵심 문제다. 국공립미술관은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이 임명권자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국민이나 시민들에게서 위임받은 책임 있는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실질적 임면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급한 정치 노름에서 미술관이 헤어날 길은 없다.

최열ㅣ소장정책과 관련해서도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은행은 코미디다. 미술계의 온갖 사람으로 구성된 추천위원이 나서고 있는 데다가 심지어 무슨 장관이 미술견본시장에서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골라 사는 것도 희안한 일인데 이게 뉴스거리가 된다. 컬렉션에 대한 정책을 따지지 전에 업무를 주관하는 국립미술관이 과연 기본을 갖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영구 보존하여 공유해야 하는 미술관 컬렉션을 위한 정책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인범ㅣ흔히 예산 타령을 하지만 예산에 기댄 컬렉션 기법은 매우 후진적인 것이다. 공공성과 전문성을 높여 미술관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작품을 기증하고 싶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 그러니 전시든 컬렉션이든 교육이든 간에 미술관 운영은 매우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이제라도 우리가 좋은 미술관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미술관 전문직들을 미술관 운영 주체로 자리 매김하여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영철ㅣ맞다. 외국 유명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고 싶어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 가령 외국 작가의 작품을 사는 데 20억 원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체 기획으로 외국인 작가의 전시를 하는 데 20억 원을 사용하면 국공립미술관의 학예사들이 국제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동시에 외국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증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미술계를 바꿀 수 있는 전문 인재 양성이 너무도 중요하다.

박천남ㅣ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은 정부가 큰 틀을 가지고 지역 국립박물관을 특화한 반면 지자체 미술관은 제대로가 아닌 제멋대로 생기고 있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지금처럼 소장품 몇 점, 전문인력 몇 명 하는 식으로 몇 가지 기계적인 요건만 충족한 상태에서 건립 허가를 내줘서는 안 된다. 미술관의 건립 목적과 미션, 시설 계획 등 미술관 건립 매뉴얼에 대해 검토한 후 건립 허가를 내줘야 한다. 지역별로 특화한 운영프로그램과 디자인을 가진 다양한 표정의 미술관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립될 수 있다.

<진행ㅣ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