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박진화 회화展/06.11.03-12.13/부산민주공원전시실 (01_03_exbi_info)


 

 

 

 



박진화 회화展/06.11.03-12.13/부산민주공원전시실  

연민憐憫

박진화 회화展

2006_1103 ▶ 2006_1213



박진화_난장-별꽃_캔버스에 유채_227×363cm_2006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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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03_금요일_06:00pm_부산 민주공원 기획 전시실

이 전시는 인천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개최되었음.




부산 민주공원 기획 전시실 / 2006_1103 ▶ 2006_1112
부산시 중구 영주동 산10-16번지
Tel. 051_462_1060



강화미술전시관 / 2006_1129 ▶ 2006_1213
강화읍 소재 구 보건소 2층
011-9033-0110






고난에 대한 열렬한 긍정, 박진화의 그림 ● 6시 30분, 아침에 눈을 뜨면, 애초부터 ‘그곳’엔 허한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초현실적인 문(門)이 있어 그 문을 여는 사람이 있고,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겠다. 한낮의 철책과 밤의 임진강 너머로 허깨비 같은 사람들이 넘나들고 있고, 흔하디 흔한 싸구려 플라스틱 사각 의자와 그 의자를 비추는 거울 같은 벽, 그 아래로 코카콜라병 하나도 모서리 난간에 조금 위태롭지만 놓여있다. 팔다리가 제각각 부숴질 듯한 네 사람은 또한 분명히 춤을 추며 ‘그곳’에 있다. 그러나 잘 보면, 그것들 모두는 없기도 한 것들이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칠한 문이 세상 어디에 있겠으며, 설사 닫는대도 그 문짝들은 너무 커서 아구가 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어찔한 현기증을 유발하는 무공간(無空間)은 어떤가, 그것은 마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닫았다 여는 순간 ‘차원’이 달라지는 신비처럼 그려졌다. 지워진 미확인 물체(보따리로 추정)의 그 있음과 없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문은 열릴 수도 있고 안 열릴 수도 있을 듯하다〈문 틈〉.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논증을 구하지는 않는다. 즉 이 사태의 진실 여부는 회화적 논증 안에서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이런 논증은 철책과 강을 넘나드는 영혼 같은 물체들의 존재〈밤과 낮〉나 〈난장-별꽃〉에서, 지상에 강림한 이 형형색색의 별들이 마치 과수원의 사과처럼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추궁하지 않는 것과 같다. ● 회화 안에는 있되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여기까지라면 그는 마치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이나 전의식의 세계를 자동기술 하듯이 ‘개연성 있는 환타지’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 과거 그의 그림은 능히 그런 범주에 속하도록 이해되어왔다. 가슴 시린 애상이 전면을 장악하는 가운데 그보다 더 처참하고 참혹한 황무지가 배경으로 깔려있거나, 소용돌이의 미친 듯한 광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인간의 행렬이 이어지는 묵시적인 풍경이거나, 불타는 바다이거나, 시멘트에 살갗을 갈아대는 참담한 기억이거나 했다. 마치 초현실주의가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의 신비나 비밀 혹은 놀라움, 그 생동적인 정신에 대한 의식만을 창조하기위한 수단이었다면, 박진화의 작품들은 ‘어깨 하나쯤은 그곳에 체중을 싣는’것을 허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 ‘신비나 비밀의 카오스’인 환타지를 화가 자신의 순수하게 내면적인 붕괴, 즉 하나의 고행 내지 ‘영적인 구원’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와 다르다. 그것은 ‘그림 안’의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삶 안’의 것을 목표로 한다. 삶의 정황이 그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림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목표로 된다. 예컨대 매우 강렬한 정신적인 노력을 통해 구상적인 주어진 것들의 위로 높이 비상한 카오스를 그려내지만, 그것을 추상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들을 발견하기 위한 전단계로 국한시키는 초현실주의들의 어법이 아니라, “있다가 (혹은) 없는” 대상의 생명의 리듬, 까칠까칠하고 불편한 현존을 너에게 혹은 나에게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앞에 놓인 하이트 맥주병을 우리는 ‘보고’만 있지는 않은 것과 같다. ‘혀’는 이미 침샘을 작동시켜 급기야 꼴깍하고 미각을 발동시키는 격이랄까. 그 때의 우리의 감각은 대상을 이미 ‘만지는’ 것이다. 주체 쪽의 감각과 대상 쪽의 힘이 교차하는 ‘곶(串)’인 것이다. 이 맥주가 가진 ‘힘’, (세상에! 맥주가 힘을 갖고 있었댄다.) 그림으로부터 ‘나갈’ 필요가 여기에 있었다. 제 3의 장소에서 만날 필요이다. 예컨대 〈난장-별꽃〉에서라면, 그 발상의 기원은 ‘그림’이 아니다. 이미 ‘난장(亂場)’이라는 용어는 놀이나 행위가 걸판지게 어우러진 연희적 상황이며, 이것이 시각화의 대상이 되었던 경우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다. 질곡의 역사에서 무명씨로 스러져간 ‘고난’ 전체를 위무하는 진혼으로써 그는 ‘눈을 감고’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눈 감아도 들리는 노래’, 그것이 채워져야만 비로소 삶의 총체가 온전히 떠오르리라는 신념의 그림, 즉 어떤 ‘결여’로서의 총체이기에 그림은 그림 안에 있지도, 그렇다고 그림 밖에 있지도 않다는 주장이 될 법하다. 그곳은 “들고 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현재(現在)’를 취하고 있다. 이는 그대로 그의 그림의 열쇠말이 된다. 나타남(現)으로서의 현재 시점과 ‘있음(在)’으로서의 현재의 장소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노파심 하나는 이를 ‘리얼리즘’으로 독해하는 오독의 경우이다. 그의 그림엔 역사와 현실이 있되 역사와 현실 안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는 역사주의적이지 않다. 역사가 화석화된 초상화로 남아 거실 높은 벽면에 걸려 위압이나 권위로 행세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보아왔던 터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비적이고 초시간적인 해탈 혹은 도통(道通)의 설법의 세계 또한 실존을 놓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뭐라 부를 것인가? 현실적 환타지? 아님, 환타지적 현실? 아니 차라리 그는 이 둘 사이를 회류하게 하는 것쯤으로 정리해둘까....




박진화_문 틈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6



박진화_아침 임진강에게 1, 2, 3, 4_캔버스에 유채_각 194×130cm_2006



박진화_임진강을 등지고 1, 2, 3_캔버스에 유채_각 194×130cm_2006


미술이 삶의 층위로 비로소 강림하게 된 우리 미술사의 80년대의 ‘현실주의미술 사건’을 그 또한 몸으로 관통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일이다. 서울미술공동체의 조직, 20대의 힘전 사태 등을 겪으며 그는 그 일원으로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었다. 현실주의라는 큰 테제는 넓게 긍정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생겨난 모색들이 이른바 회화적 형식개념을 더 천착했거나 혹은 민중적 정서개념을 더 천착했던 두 개의 경향이다. 박진화의 그림을 위한 부언설명이라면, 이 두 유파 사이의 골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으로도 칭해 보겠다. 즉 현실을 좀 더 딱딱하게, 곧 역사에 조금 과도하게 무거운 외투를 입힌 회화적 형식개념파(派)와 신비적이고 초시간적인 시원(始原)의 지점으로부터 당연함을 길어와, 따라서 이 지상으로부터 적어도 10센티미터쯤은 공중부양된 꿈의 세계를 그리고자한 민중적 정서개념파(派), 둘 다로부터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그의 ‘연민(憐憫)’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를 긍휼히 여겨 애상에 빠지는 동정심과는 차디찬 결별을 한다(그는 실제로 ‘차가운 사람’이다. 그는 진실로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 인간적 친소에 상관 없이 빠이빠이 하는 사람이다. 필자는 혹 그가 연전에 민미협 회장선거에 나와 미끄러지더니 그런 벽을 쌓았나 의심해 보았지만, 아니, 그 벽은 오래된 그의 습벽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적을 많이 만들어 미끄러진 게 아닌가고 판단하고 있다. 어쨌건. 예술가에게 그런 적은 많을수록 좋은 거고...). ● 그의 육성에 의하자면, 연민은 “삶이 시작되었음으로 파생된, 이행(移行)의 뜻이자 부피”다. 삶이란 게 어디서부터, 혹은 왜 시작되었는가를 물을 수 없는, 살아있음으로 계속 그렇게 죽 살아가야하는, “늘 그렇구나!”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 ‘물음 묻기의 근원적 불가능성’, ‘뭐라고 단언할 수 없는 주저함’은 거북등처럼 딱딱한 ‘형식’만으로는, 두루뭉수리한 추상적 ‘내용’만으로는, 마디마디가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뼈들의 절합(articulation)상태와 같은 최종의 미학적 목표, 즉 생명의 힘을 드러내지 못할 거라는 염려에 닿아있다. 현실과 환타지가 뒤섞여 함께 있는, 지금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다가가면 가상일 것, 그리하여 멀어지는 순간 그것은 현실보다 더한 실재로 다가오는, ‘꽉 찬 현재’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에겐 ‘현재’만 있다. 30분이 채 못돼 다다르게 되는, 분명 구멍이 숭숭 뚫린 그 철책 너머로 임진강과 그 너머가 보이지만 실은 장벽보다 더 캄캄한 불투명한 ‘벽’이 그의 공간지리적 ‘이곳(在)’이다. 또한 그의 ‘지금(現)’은 강화도 마니산을 1년이면 50회 이상을 매년 오르며, “왜 이 나라를 세우셨어요?”라며 건국(建國)의 이유를 존재와 문답하는 대화의 시간이기도 하다. ● 그는 바람결에겐, 새들에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철책을 기대어 서 있다. 그 철책을 통해 불통(不通)은 곧 ‘경계지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길게 가로놓인 철책을 통해 자기인식의 한계를 확인하며 분단과 통일이라는 거대구도로서의 주제를 넘어설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이는 이 ‘물음 묻기의 불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업의 상태에 있다는, 아니 최소한 어떤 ‘지극한 예술’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대속(代贖)하리라는 환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논고장에 가깝다. ● 시츄에이션이 필요하다. / #1: 그가 철책에 다다랐다. / #2: (그는 이제 뒤돌아서거나 아님, 기어이 가겠다고 우겨야하는 두 가지 상황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그냥 머뭇거리고 있다. / #3: 철책은 “이제 그만 돌아가시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머뭇거린다. / #4: 그는, 자기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라며 철책에 더 바짝 붙는다. / #5: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는 철책에 빨래처럼 걸린 채 말라가고 있다.-암전후 점점 밝아짐-




박진화_저녁 임진강에게 1, 2, 3_캔버스에 유채_각 194×130cm_2006



박진화_철책에 걸린 도깨비Ⅱ 1, 2_캔버스에 유채_각 194×130cm_2006



박진화_춤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6_부분


고난의 그림, 그 철책 너머 저쪽은 ‘교조’이며, 철책이 벽임을 알고 돌아선 이쪽은 ‘추상’임을 알아, 그는 그 철책 앞에 엎어진 것, 차라리 빨래로 걸려버린 것이다. 지금 이곳의 비천한 현재로 귀속되는 것이다. ‘현재’를 택한 그의 운명이다. 과거가 ‘교조들’이라면, 미래는 ‘추상들’의 그윽한 놀이터, 희희락락 짖고 까부는 보호구역이었던 터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양분한다. 과거에게도 미래에게도 그 어느 쪽에도 맘 주지 못하고, 과거를 잊는 미래파들을 질타하고 미래가 없는 과거파들을 경멸한다. 이는 그의 그림이 ‘고난의 그림’일 수밖에 없을 운명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패배적 고난, 굴종적 수난의 그림은 아니다. 자처한 고난, 즐거운 수난을 마중 가는 능동태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비극이 화원(花園)일 수 있었던 것〈난장-별꽃〉, 강 위에 숲과 꽃잎과 불꽃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임진강을 등지고Ⅱ〉은 이 때문이다. ● ‘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를 역사주의적으로 붙잡아 매는 있음도, 미래를 분열증적으로 선취하는 집착적 있음도 아닌, 현재의 ‘있다가도 없어야 할’ 있음이다. 눈에 대한 손의 종속관계, 예컨대 손의 기량이 눈의 목격한 바를 묘사하는데 능력부족을 느낄 정도여서는 안될 것! 이라는, ‘기량의 연마’가 화가의 최소 요건이라는 그 오래된 대전제를 그는 간단히 무시한다. 그는 ‘그림이 잘 그려진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손이 제 기량을 자랑하고 과시하려 할 즈음, 손은 눈을 눈멀게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이다. 이른바 ‘냉정’을 잃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며, 지금(現)의 ‘시간’의 뜬 눈으로 ‘공간’을 감시해야 한다는 의무를 말함이다. 공간과 시간이 이처럼 갈마드는 속성이 있음을, 공간은 시간에 의해 상감(象嵌)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갈파한 명민성이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화석화를 풀어헤쳐 그것이 현재에 용해되도록 허용하고 ‘미래’에의 개방된 담보로 묶어두는 현재의 통섭이 그것이다. 그것은 전생과 내세를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는 당골네처럼 신비적이고 초시간적인 도사연하는 시간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멜랑콜리가 있다고 자기 먼저 울어버리는 신파조 엄살의 시간도 아닌 지금, 현재의 시간이다. 이 땅, 이 역사의 통째의 결핍과 불일치의 힘으로 분단의 단절을 일시에 무시간화시키며 그것이 철책을 넘나드는 공간을 상감되게 하는 것이다. ● 그렇기에 그것은 ‘그려진다’. 눈의 광학적 기능의 사주를 받은 손의 그려나감이 아니라, 손의 만지는 기능을 시각에 위임한 채로 눈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다. 〈춤〉을 대하는 처음은 버스가 지나간 흙먼지가 가득 찬 푸석한 시골길 같은 것이었다가, 10여분이 지나면서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점점 끈적끈적한 진흙 점토 부조처럼 그 존재를 드러낸다. 파훼된 인간, 영육이 공존하는 이 새로운 형태는 전회화적인 내면의 떨림을 지나, 형태의 붕괴도 지나, 또 다른 형태로 이행하는 변형(transformation)의 ‘변變(trans)’의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독자여, 이제 그 변의 순간이 접었다 펼치는 공간을 보시라. 그것은 형태를 필요악으로 만들면서(그의 ‘춤’은 좋아서, 흥에 겨워 추는 춤이 아닌, ‘미쳐서’ 추는 춤,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가도 “좋다고” 추는 춤일 테니... 육신도 아니며 영혼도 아닌, 차례차례 부셔져 ‘미침’ 그 자체로 변화해가는...,) 맨살(肉)로 펄떡인다. 어린 날 개구리의 가죽을 벗겨 구워 먹어 본 개구쟁이들은 알리라. 그 팔딱이는 맨살의 경이와 죄스러움과 또 그 맛까지도. 이게 삶이었을까..., 처음엔 마지못하다가, 나중엔 하염없다가, 종내엔 어쩔 수 없어져, 미친 듯한 이 긍정. 다가갈수록 박진화의 그림은 징하다. ■ 박응주

Vol.061103e | 박진화 회화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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