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민족민중미술운동사
부산지역 민족민중미술운동사 정립을 위한 제언
배 인 석 ( (사)민족미술인협회 사무처장 )1)
들어가면서
1989년, 일찍이 시작된 민족미술운동이 더욱 활발해 지고, 정부에 의한 탄압이 극에 달할 때 필자는 학생미술운동을 터전으로 민족미술운동 진영의 한 자락으로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학생회 활동의 시각매체를 주로 담당했던 미술동아리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그 해 겨울을 끝으로 예술대학 내의 학생들로 구성된 미술패[까끄라기]를 새로이 창립하게 되었다. “미술운동은 미술대 학생이 담당해야 한다!“는 당시의 짧은 구호로도 알 수 있듯이, 미술학도로서의 자기 전공에 대한 정체성과 학생운동 속에서의 임무를 자각 하였던 시절이었다. 이 후 미술패 활동을 하면서 발생했던 예상치 않았던 여러 문제들을 접하게 되었는 바, 그 중 흥미로운 대목은 전체 민족미술운동사에서 87, 88년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적인 입장과 노선의 차이, 또는 활동을 중심에 두고 분열되었던 성향들이 자연스럽게 이때에도 창립이 얼마 되지 않은 미술패 안에서 창작활동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제기되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4-5년 먼저 생긴 비전공 학생들로 구성된 미술패에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구성원들의 문제의식 이였던 것이다. 당시의 문제는 아주 쉽게 정리 되었다.창립 전을 치룬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시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해야 된다는 학생들은 자신의 작업실로 모두 돌아가고, 미술패는 현장중심의 활동 파들만이 남았다. 시대의 높이도 그러 하거니와 자신의 전공을 책임 있게 고민하는 태도가 이런 갈림길을 단시간에 더욱 가속 시켰으리란 생각을 해 본다. 그 때 당시 학생운동은 전민항쟁의 전위대로 스스로의 역할을 규정하였는바 사회운동에 있어서 여러 분야의 운동들과의 헌신적인 연대가 한창인 때였다. 이런 와 중에 그나마 학생운동의 근거지인 학교가 봄날이면 학교를 떠난 사회의 진출은 겨울로 접어드는 문턱을 넘는 다는 표현을 쓸 정도였으니 학생운동의 헌신적인 연대 사업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때문에 학교를 떠나 사회 속에서의 전문 미술가로 진출하여 미술운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험난함을 약속 받는 것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부산이란 공간에서 벌어졌던 미술운동의 내막은 여타 운동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를 간과 하지 않을 수 없는 미술가들의 고충과 헌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의 미술운동사는 먼저 대략 87년 [낙동강]이란 동인 모임의 창립에서부터 소규모 동인의 활발한 활동을 거치는 1차 시기와 88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부산지역 대표체인[부산미술운동연구소]활동 그리고, 93년[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해소로 인한 [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연속된 자진 해산을 맞이하는 2차시기. 그리고 다시 부분적인 소동인 모임의 지속과 출현이 있었던 3차시기를 거쳐 95년 [가마골미술인협의회]의 창립과 활동기를 4차로 여기에 2000년 [부산민족미술인협회]로의 개칭에 따른 활동 이 후 현재까지를 세부로 잡아 5차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운동단체의 모임과 흩어짐 그리고, 개칭에 따른 편의적인 시기 구분법일 뿐이다. 많은 부분, 중심과 주변부의 활동을 사료적인 가치가 충만하게 서술하고, 증거 해야 되지만, 아직도 이런 조사와 증거를 제시 할 수 있는 채집의 여력이나, 보존되어 확인 할 수 있는 자료의 물적인 양을 보더라도 미흡하기 그지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부산의 미술운동사를 필자가 정리하기에는 89년 이전 선행된 미술운동을 체험하지 못한 한계가 여기에 가중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좀 더 체계적이고 주변부까지 열거하는 부산지역의 미술운동사로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부산지역 미술운동사의 정립을 위한 기초적인 제언 정도의 내용을 담은 글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전체, 즉 한국민족민중미술운동사의 전개에 비하여 부산 미술운동의 역사는 일정, 시기적인 간극이 있으므로 해서 현재 (사)민족미술인협회의 사료를 빌려 87년 전 까지의 전체 미술운동사를 부득불 추가하여 참고를 하였고,2) 87년부터는 부산지역의 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권산의 <부산지역 민족민중미술운동 小史>를 참고로 하였다. 권산의 글은 적지만 그나마 부산의 미술운동사를 담아낸 소중한 글임에 분명하다.그리고 이 후는 필자가 활동했던 단체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당시의 주변 동인단체의 활동 상을 취재 하였는바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는 취재에 따른 시간의 부족함과 취재에 협조하는 이들이 전적으로 과거의 기억에 의존 하고 있고, 당시 자료의 절대 부족에서 오는 미흡함이 있었다는 것이 어설픈 변명이다. 그간 부산에서 활동했던 많은 동인모임 미술가들의 증언과 자료들이 제 빛을 보아, 부산미술의 제부인 역동적인 역사를 채워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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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인석은 부산 동아대에 입학 그림패 [열린그림마당]을 거쳐 예술대학에서 그림패 [까끄라기] 창립에 참여 하였으며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과[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민족해방운동사 제작을 함께 하였다. 졸업 후 [새물결],[가마골미술인협의회],[부산젊은미술가모임“뚝”],[부산민족미술인협회],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현재는 [(사)민족미술인협회] 사무처에서 일하고 있다.
2) [낙동강] 이 전의 전사(前史)를 부산에서 찾아내고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한국민족민중미술운동 전개 시기에서 90년대는 지역운동의 성장 시기이다. 벌써 90년대 초반에 충북, 대구, 제주, 인천 등지에서는 지역별 민족미술인단체의 창립과 더불어 지역사업을 구체적으로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터에, 95년 [가마골미술인협의회]의 창립은 전체 흐름에 비하여 다소 늦은 감과 더불어 정체성과 정통성의 모호함이 혼재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창립과 그 활동은 전체 한국민족민중미술운동의 흐름과 시기에 일치하였던 한 부분으로 부산 미술운동의 동시적인 역사성을 말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전사(前史)로서 전체 미술운동의 흐름을 보는 것은 한국민족민중미술운동사 속에서 부산의 미술운동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로보기 위한 조건이라 여겨진다.
[낙동강]창립 이전- 한국 민족민중미술운동의 전개
문학 쪽에서 소위 순수와 참여 논쟁이 한창인 1960년 10월에 시인 김지하가 기초하고 미술평론가 김윤수가 감수한 <현실동인 제1선언>이 발표 되었다.이 선언문은 서울미대에 재학 중인 오윤등 그룹[현실동인전]의 카탈로그에 수록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 미술 속에서 창궐하고 있던 형식주의와 자연주의 미학의 오류를 비판하고,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라는 점을 분명한 어조로 공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교수들과 관계기관에 의하여 오윤의 그림은 압수당하고 찢겨져 없어지므로, 전시회는 취소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에서 민족민중미술의 출현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성명서 사건 이였다. 이 후 80년대 동인활동과 미술비평의 활성화가 분출되기까지 70년대를 거치는 10여년 잠복기는 당연 비평가들의 몫이 컸다. 김윤수의 <한국 현대회화사>를 비롯하여, 그의 <한국 추상미술의 반성>, <삶의 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 등 일련의 비평은 80년대 민족민중미술의 방향에 하나의 지침서 구실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0년대 김윤수가 발표한 요지는 “현실 또는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순수하고 독창적이며 지고의 것으로 대접받게 되지만, 반대로 현실에 대해서는 그만큼 무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추상미술은 서구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 사회의 모순이 확대, 심화됨에 따라 더욱 고립되고 무력해진 개인이 자기 존재와 자유를 비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렇게 80년대의 한국현대미술계가 모더니즘, 민중미술계 화가들과 그 비평가군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감의 전조를 보이며 서서히 운동은 준비되어가고 있었다.이렇게 민중미술의 이론적 근거는 김윤수로 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80년에 들어와 또 다른 이론가들에 의한 적극적 실천으로 이어졌으며 이 후 그 중심에는 원동석, 성완경, 최민 등의 비평가들이 있었다. 김윤수가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였다면, 원동석은 개념설정에, 성완경, 최민은 구체적 실천방향과 지침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중미술을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은 유홍준 등 다수의 소장 이론가들 이었다.80년대 민족민중미술은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현실과 발언],[두렁],[임술년],[서울미술공동체]등 미술가 동인 모임이 속속들이 결성되어졌고, 그 기저에는 광주민중항쟁으로 표면화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상황에서 미술계를 흉흉하게 떠도는 관념적인 한국현대미술이 있었던 것이다. 이 후 활발한 동인모임의 미술운동이 전개되던 1984년까지를 거쳐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 대한 당국의 탄압에 이어 85년 11월 22일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현실과 발언],[두렁],[임술년],[서울미술공동체]회원을 포함한 120여명의 미술가들이 모여 [민족미술협의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임원으론 대표에 손장섭, 사무총장에 김용태, 총무에 홍선웅 등으로 진용을 갖추어, 동인 모임에서 더 한층 결집을 한 [민족미술협의회]는 연이어 발생된 ‘깡순이 작가 이은홍 구속사건’, ‘신촌벽화 및 정릉벽화 파괴 사건’에 대항하며 기관지<민족미술>을 창간하고 86년에는 그림마당 [민]을 개관하면서 민족민중미술의 전시, 집회, 교육 및 민족민중미술 진영의 저항의 거점을 형성하게 된다. 이 후 87년의 대통령 선거 과정을 거치면서 조직 내의 제 입장의 차이로 분열과 조직의 이탈이 생기는데, 이는 88년「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이라는 단체로 조직화 된다. [민미련]은 지역미술운동과 학생미술운동을 기반으로 하여 강령적 차원에서 정치사상적, 미적 입장을 통일시키고자 했다.3) [민미련]의 결성으로 민중미술은 양분되었지만, 전국에 산재한 미술인들과 단체를 그 산하에 둠으로써 지방/중앙의 차별화를 해소하고 또한 현장중심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서 실천적 파급력을 증진시켰다는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민미련]은 강령의존적, 조직복속적 한계를 노출시키는 역기능과 조직의 분열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기도 한다. 한편 [민미련]에 참가 했던 최열은 [민미련]이 출범하며 [민미협]과 일정한 갈등을 보인 바도 있지만 민족미술진영은 전국 민족미술가 단일대오를 표방하는 [민미협]과 현장 활동을 지향하는 청년미술가 연합체계를 내세우는 [민미련]이 중층적으로 배치된 짜임새를 갖추었고, 1990년에 접어들어 강령을 채택하고 조직을 개편해 나가는 가운데 독자적인 질을 갖는 사업의 내용과 형식을 체계화해 나갔다. 는 평을 더불어 하고 있다. 이 지점까지를 낙동강의 전사(前史)로 한국민족민중운동사의 흐름으로 참고하고 다음은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당시 1994년 개최된 민중미술 15년 전 추진위원회가 3기로 나누었던 한국민중민족미술운동사의 구획을 참고하길 바란다.4)
A. 초기 : 소집단 운동과 민중미술의 형성(1980~1984)
B. 중기 : 전국미술인 조직의 결성과 미술운동의 확산(1985~1989)
C. 현재 : 창작의 결실과 진전(1990~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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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지점에서 85년 창립 이 후[민미협]은 세대갈등의 양상이 표면화되는데 민미협의 주축인 [현실과 발언]세대들은 전문성, 개인성, 예술성, 그리고 현실비판을 지향했음에 비해, 신세대는 운동성, 정치성, 계급성, 현실변혁과 같은 다른 의식을 지녀 나가기 시작했고, 이로서 조직의 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http://simone.netian.com/한국의 현대미술 / 민중미술 편
4) 민예총 10년사 / (사)민족예술인총연합 / 1998년 / 민미협-미술연합 13년 약사 p.161-p.165
http://simone.netian.com/한국의 현대미술 / 민중미술 편을 참고 바람
[낙동강]의 창립과 활동
1987년 봄, 부산의 미술가들의 회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5개월 정도의 논의를 하면서, 부산에서 조직적인 사회 미술운동 모임의 필요성과 지역운동에 기반을 둔 민족자주문화의 건설을 공감하게 된다. 이들은 벌써 모임의 탄생 이 전부터 이미 부산 수산대학교에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개최한 통일문화제에 부산지역 최초의 조직적 창작물인 ‘한국민중100년사’展을 개최한 바 있었고, 8월에는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에 곽영화 회원을 파견하여 장례용 걸개그림과 영정을 제작하게 하는 등의 선행 미술활동을 수행하였다.1987년 9월 26일 남포동 백색화랑에서는 구자상, 곽영화, 김상화, 권산, 황의완, 김황수, 정재명, 이상적, 김을중, 허창수 등이 참가하는 개관기념전이 열렸다. 이 개관전은 5개월여 논의의 결실인 부산민족민중미술의 전주(前奏)인 그림패 [낙동강]의 창립 전 이였다. 87년은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거리에서 전민항쟁을 맛보았던 시기 일 뿐더러,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직선의 쟁취와 더불어 민중진영에서는 정권 교체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던 시기였다. 이 지점에서 [낙동강]은 동인모임으로 출발을 하였으나 창립 前부터 현장미술과 선전미술의 선행을 보더라도 선전미술 활동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9월 창립 전 이 후, 10월 [낙동강]은 동래 산성에서 회의를 갖는다. 이 회의에서는 앞으로의 전시활동 외에 당면에 닥친 대선 정국에서 선전미술 활동에 대한 대책과 조직의 강화가 주된 내용이었다.12월의 대선이 임박해 오면서 [낙동강]은 국민운동본부에 회원을 파견하고 제반 선전물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저녁이면 2인 1조로 지역 선전 작업을 나가고, 다함께 지하철 등에서 목소리로 선전전을 펼치는 활동들 이였다. 또한 모든 회원이 부산진구에 공정선거감시활동을 나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87년 12월의 대선은 이들의 몸과 마을을 모두 싸늘한 겨울로 몰아넣었다. 꿈에 부풀었던 정권교체가 실패 한 것이다. 해를 바꾸어 88년 [낙동강]은 부산지역 대학 미술패 연합이라는 조직적 성과를 기반으로 부산지역 대학 미술패 강화의 목적을 위해 당시 부산공업대학에서 대학 미술패와 함께 ‘민족미술학교’를 개최함과 동시에 <민족미술학교>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 한다. 대선에 연이은 총선 공간에서는 이재진, 김황수 회원을 울산으로 파견하여 노동자 김진국 후보의 선거를 도왔으며, 부산의 회원들은 당시 부산 동구에서 첫 출마한 노무현 후보 진영의 선전물을 담당하였다. 5월이 되면서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부산데파트 건물에 처음으로 사무실을 열게 되었고, 다음 달인 6월에는 부산가톨릭센터에서 ‘反공해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낙동강]의 회원전이 아닌 부산. 경남지역의 진보적 성향의 미술가들을 아우르는 기획된 전시회였다. ‘反공해전’은 상대적으로 조직화가 열악했던 마산, 울산지역의 미술가들을 결집시키는 긍정적인 성과를 내어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 8월 [낙동강]은 동인적 위상에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미 조직 내에서는 노동현장에서의 미술활동을 지향하는 회원이 있었고, 계속 동인적 위상을 견지해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활미술공방 [꽃다림]이 분리되고 [부산미술운동연구소] 로 조직명과 조직체계를 개편 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낙동강]은 [일 그림패]와 [낙동강]으로 회원들의 지향에 따른 양분화된 협동체로 나누어진다. 당시 두 단위의 주요 책임을 [낙동강]은 곽영화 회원이, [일 그림패]는 정재명 회원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양 단위의 상이한 활동에 따른 조율과 통합을 위하여 사무국을 두었다. 이러한 조직의 모양새는 다시금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한계속에서 당시 요구되었던 미술 동인적 위상과 현장미술활동에 대한 요구를 모두 수용한 타협과 절충에 의하여 생산된 조직형식이었으리라 짐작이 되어진다. 이 부분을 권산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소조라는 미술가조직 체계는 미술운동의 내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실의 요구에 견인되어가는 성격이 짙었다. 이것이 당위성과 원칙이 우선시 되던 시대의 모습이었다. 당위성과 원칙이 우선시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을 거부하기에는 역사의 고통이 너무나 컸다. 정신과 윤리적 힘이 80년대를 이끌어 온 것은 이러한 역사성의 결과였다. 다만 문제는 현실과 당위, 원칙의 변증법적 관계였다. 조직은 존재의 요구에 의해서 발생한다. 존재의 요구와 원칙이 일치한다면 그것은 바로 상승 발전할 수 있는 주객관적 요건이 갖추어졌음을 알리는 것이다. 낙동강이 미술활동가 체계라는 지적과 평가는 존재조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미술운동의 일반 수준은 예술가운동으로서 자기 위상조차 정확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었고,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미술투쟁의 역할에 대해서 유보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대중조직이 일반화 되지 못한 시기에 진보적 미술가조직은 여타의 운동조직과 마찬가지로 활동가적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도기에 정치의식이 미술보다 힘이 세었던 것은 분명하다. 모든 일과 진행이 물 흐르듯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른바 적대적인 세력을 반대편에 두고 있는 싸움판에서 대개는 선명한 입장이 논의를 주도한다. 낙동강에서 일그림패, 낙동강으로의 분리는 이런 제반 여건에 기인한 것이었다.5)
[낙동강]의 조직은 목적의식적인 조직성격을 통합하여 분명히 하거나 그에 준한 활동을 스스로 보여 주지는 못 하였지만, 부산이란 지역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을 미술가로서 몸소 인식하고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하기 위한 동업의 소 집단적 모임의 성격이 더욱 컸었다고 하겠다. 때문에 혼재된 다양한 활동은 미술과 미술외적인 활동으로 나타났으며, 이 후 조직의 분화에 대한 갈등과 모순을 내포 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당시의 시대높이로 보아 표면화되기 힘든 반면 조직의 내부적인 성숙도도 여기에 못 미친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은 의식적인 부산의 미술가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서 이 후 부산 민족미술운동의 전개에 있어 사회미술운동의 진원지로서의 양심적이고 자발적인 미술가 모임과 활동체이였음에 부산미술사에 그 의의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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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산지역 민족민중미술운동 小史 中 / 2004 / 권산
[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탄생과 해산까지
88년 9월 [부산미술운동연구소]는 대연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한다. 이 사무실은 부산지역문화운동단체들이 함께 사무실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간 이였다. 이러한 공간의 활용으로 보아 이때의 시기가 부산지역의 각 매체별 소집단 활동의 활발함과 매체 간 활발한 연대가 가능 하였으리라 여겨진다.여기서 [부산미술운동연구소]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판화와 만화 강습을 상시화 시키나가면서 조직적인 현장 미술 활동의 모양새를 갖추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한 11월에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와 결합을 하는데, 이는 앞서서 말했던 약칭 [민미련]이란 이름으로, 여기서 [부산미술운동연구소]는 부산의 지역 조직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다.
이는 우선 현장 활동과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지역중심의 미술활동을 고민하는 지점에서 이를 내세우는 [민미련]이란 전국 연합체는 [부산미술운동연구소]와 그 목적이 상단 부분 교통 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전국적인 소통과 단일한 강령과 활동의 일괄성을 통하여 현장 활동에 대한 명백한 자기 논리를 획득하여 노선으로 삼게 되는 계기점이 되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지역 활동에 대한 논리적 인식과 주체적인 의식 또한 진일보 하게 된다. 88년 8월경에 발행된 <미술운동1>의 부산[낙동강]편에는 박영정의 글을 빌려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즉‘서울-지방’ ‘중심-주변’의 이중구조적 개념이어서는 아니 되고, 단순히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구분의 뜻으로서의 지역이란 말이 사용되어져야 한다.6)
이는 [부산미술운동연구소]가 이제 어떠한 활동을 할 것인가가 확고해 졌다는 것이고, 그 답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지원과 연대활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징후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과정에서 행해졌던 것이 <반핵, 반미, 평화 - 벽보선전전>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송문익이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오현숙, 오(?)현욱, 김용재가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을 했다. 이후 89년에는 김대현, 김형대, 배용관, 예정훈이 가입을 하면서 인적인 구성에 힘을 얻게 된다. 89년에는 첫번째 <시민미술학교>를 개최하면서<임투문화>를 발행하게 되는데,<임투문화>는 <시민미술학교> 사업의 결과물을 엮은 자료집이었다.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에 의하여 발주된 전국지역조직간의 공동창작물인 대하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이때에 그려지면서, 부산 또한 [부산미술운동연구소]와[부산지역 대학미술패연합]이 4.19항쟁과 부,마항쟁의 창작 작업에 착수하면서, 한편으론 현장에서 요구되는 선전물 제작을 병행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또한 현장의 요구에 의한 전시 사업 외에 지역 간 연대전시를 하게 되는데, 부산에서는 가톨릭센터에서 현대중공업파업투쟁을 주제로 한 <80년대 - 일하는 사람들展>과 광주에서의 <오월미술전> 서울에서의<현실과 변혁의 반영展>등이 그 것이다. 같은 해 6월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77m에 달하는 <민족해방운동사>가 불태워지고 찢겨지면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과 그 산하조직은 공안당국에 의한 탄압의 시기로 접어드는데, 부산의 [부산미술운동연구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8월4일을 기점으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전체회원은 수배상태가 되었다. 이런 중에도 [부산미술운동연구소]는 사무실을 폐쇄한 후 경성대학교로 거처를 임시로 옮겨 미술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부자유스러운 활동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지속적인 현장지원활동과 당면의 이슈인 <구속미술인 작품展>외 <부활하는 항쟁展>등의 전시를 개최하였다. 11월이 지나서야 탄압이 다소 완화 될 지점, 양정에 사무실을 다시 마련하면서 새로이 활동을 준비하게 되었다.7) 이 때야 비로소 차츰 회원들은 ‘전업적 미술활동가’라는 개념이 확고히 형성되고 있었던 시점이다. 이런 개념의 바탕 하에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지역조직(부산, 대구, 대전, 마산, 광주, 서울, 전주)은 일치된 미술활동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1990년 조직정비와 회원이입이 이루어지는데 2월에 체계를 정비하여 김상화가 대표가 되고, 7월에 다시 송문익이 대표로 재 선출된다. 7월의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수련회에서 전국순회 전시회 <민족자주미술展>을 결정하고 각 지역에서 파견하는 형식으로 <8.15 범민족대회> 선전활동을 하게 된다. 회원들의 상황은 1월의 이정자의 가입과 권산의 복귀에 이어 가을에는 준 회원제에 따라 가입회원이 늘어나는데 이때의 회원이 부이비, 전기학, 이아영, 이정순, 최미란, 이태구, 이명귀등으로 회원의 수가 불어났다. 구체적인 조직의 개편은 전국의 지역조직을 아우르는 체계개편의 합의로 인한 정연성을 보장하면서 ‘미술투쟁대중조직노선’을 견지 하였다. 연합체다운 전국조직의 면모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현장지원미술과 화단을 중심으로 하는 이분화 된 활동양상을 계속 보이고 있는데, 전자가 민중연대위원회로 후자가 창작위원회로 이름을 달리하여 나타나게 된다. 1991년 3월 서울의 지역조직인 [서울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에 대한 탄압 사건이 발생하여 14명의 회원이 구속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하여 또 다시 부산의 사무실은 폐쇄에 놓이게 되고, 또 다시 구속미술인 석방투쟁을 전개하는 악 순환이 반복되기에 이른다. 이 와중에 시위진압 전경에 의하여 숨진 대학생 강경대로 인한 김귀정 등의 분신사건이 연이어 일어남으로서, 미술가들을 현장에 속속들이 복귀시키는 전 민중적인 항쟁의 환경이 되므로, 창작위원회의 활동은 지리부진하다 못해 그 수행의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주변의 정세는 어찌 할 수없이 미술가들을 역사의 품안으로 불러드리고 그 통제력을 보류하게끔 만들고 있었으니, 열정적인 미술활동에 독재정권은 더 강한 탄압으로 맞대응하는 과정의 재 반복은, 모두에게 상처를 내며 지쳐들 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무너져가는 것은 탄압의 대상자가 아니라, 탄압을 하는 그들 이였다. 민중들은 벌써 많은 것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역사의 항쟁 속에서 깨쳐가고 있는 과정이었을 뿐 이였다. 다시 [부산미술운동연구소] 사무실은 장전동으로 이전 되어졌고 조직은 많은 피로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1992년 2월의 2차 총회에서 배용관이 복귀를 했고 윤진, 최미란의 새 회원이 마지막으로 들어 왔다. 다시 사무실은 가동의 시기를 맞게 된 것 이다. 대선이 당해에 있는 것만으로도 활동의 정열을 다시금 불사르기에는 충분 하였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5월에 ‘일하는 사람들 展’이 열려지고 몇 차례의 선전물작업이 있었다. 8월에 있었던 김성호 열사에 대한 장례지원활동은 [부산미술운동연구소] 조직체계하의 마지막 현장 미술활동으로 기록되어지면서 다가온 겨울은 예전처럼 여전히 싸늘한 추위로 부산의 미술운동가들을 맞이 하였다. 또 다시 대선에서 민주진영은 패배했던 것이다. 1993.1.9~10. 전주에서의 6차 총회에서[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은 스스로 조직해소를 결의했다. 이에 따라 [부산미술운동연구소]또한 자동 해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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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술운동1 / 1998 / 공동체 / p.103
7)'민족해방운동사'는 세로 2.5m에 가로 7m의 그림 11폭이 이어진 대형 걸개그림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일제 침탈기, 해방 뒤 한국전쟁, 5·18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11개의 테마로 나누어 80여명의 작가들이 그린 대작이다.1989년 6월 홍씨는 이 그림을 슬라이드 필름에 담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보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이적표현물 제작·배포)로 구속됐다. 작품은 이미 서울의 한양대학교에서 열렸던 집회에 내걸렸다가 경찰에 의해 불태워없어진 뒤였다. 89년 이른바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의장이였던 홍성담씨는 안기부에서 수사를 받는 20여 일 동안 변호인 접견을 금지당한 채 고문을 당했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홍씨는 자신의 진술을 모두 부인했고 결국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변호인 접견권이 금지 당한 상태에서 받은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며 홍씨에 대한 7개의 혐의 중 2개의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하며 끝을 맺었다.
소모임 단체의 출현과 활동
<해빙>
90년에 민족미술을 표방, 제도미술계와 차별을 선언하며 <해빙> 그룹이 창립 되었다.
당시 구성원은 김성룡,김은곤,송문익,양호규,박은국,이석금,이인철,전창래,부이비,김민석등이였으며 이 후 심점환, 방정아가 결합한다. <해빙>그룹은 동인모임의 성격으로 해마다 정기 회원 전을 개최하며 민족미술의 개별창작과 화랑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미술에 대한 대안적인 창작활동을 하였다. 또한 부산내의 리얼리즘계통의 미술가 그룹으로서 부산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전시를 동시에 개최하기도 하였다. <해빙>은 당시 부산의 민족미술 판에서는 중진그룹의 위치와 부산미술계에 리얼리즘 미술을 알려내고 영향을 주었던 의미 있는 부산의 자생 미술가 단체였다. 다음은 <해빙>의 주요 활동이다.
90. 경오년 해빙-그 열림전 (다다 갤러리 )/ 91.자갈치에서 산복도로까지 (서울-그림마당.민,대구-예술마당.솔,부산- 타워갤러리.순회전)/ 93.겨울 민들레 (갤러리 누보)/94.자유의 숲 (오름 갤러리)
<부산지역청년미술인회-이하 청미회>
<청미회>는 처음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족되어진 지역조직이었으나 여타의 지역은 단명한데 비하여 부산의 <청미회>만이 오랜 기간 동안 회를 유지하게 된다. 이 회의 성립은 1991년 12월의 창립 전에서 밝혔듯이 민족민중미술의 역사 속에서 부산의 민족민중미술 활동에 대한 의문제기에 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이던 현장미술이 가장 진보적이고 변혁적이라는 의식의 반론이며, 기존 제도권에 만연된 형식의 재검토와 더불어 민중들의 향유권을 위해 이를 되찾아 전화시켜야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므로 민중미술의 보다 넓은 지평을 확대하길 원하였다.
..... 우리는 제도권의 부분으로 인정되어 왔던 모든 것에 의문을 갖고 그것을 다시 뺏어와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민중의 정신을 불어넣고 모든 예술행위가 민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화시켜 내어야 한다. 그것이 미술인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인 것이며, 민중미술의 보다 넓은 지평의 확대인 것이다. “예술을 인류와 친밀한 사이가 되게 하는 것은 민중과 민중사이의 최단 경로처럼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손쉽게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길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대중의 광범위하고 풍부한 교육을 통하여 도달되는 머나먼 길이다.”라는 에른스트 피셔의 말처럼 미술인은 이제 이 길에 도달하기위해 단지 생산할 뿐 아니라 실험하고 또한 교육까지 담당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8)
8)가마골 -그 사람사는 이야기-도록 / 1991년
<청미회>는 1991년 2월경에 창립 모임을 가지고, 기장의 고리 원자력부근의 야외 스켓치와 회의를 통하여 8월에 결성을 하고, 그 해 12월 가톨릭센타에서 가마골 -그 사람사는 이야기의 창립 전을 하게 된다. 당시의 참가자는 강주완,김은곤,김병준,김형대,권수진,박찬권,박영수,백원규,변용규,송은주,이정자,이정순,이준기,이태구,임현옥,장용호,전기학,조순자,차윤기,최선아,황경희,황창수등 이였고, 이 후에 김덕진,김진희,김지숙,설종보,방정아,이태우,전미경,정재학등이 합류한다. 이들은 혼란한 시대를 대학에서 겪거나, 대학 그림 패 출신들로서 갓 사회에 진출한 부산을 연고로 하는 청년미술인들이였다. 이들은 기존의 민족민중미술운동의 정당함의 인식하에 비판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민중미술의 범주에 속하면서, 좀 더 민중미술의 넓은 지평을 향한 작가주의적인 접근을 해나갔다. 때문에 주된 활동은 개인 창작과 화랑을 중심으로 전시회의 활동형태를 보였다. 매년 개최되는 전시회는 주제 전을 상정하여 접근을 하였는데, 처음 몇 년의 추상적인 주제제시에서 이 후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다루게 되며, 여성회원들의 경우 사회 관습에 대한 제고 등 여성문제를 주제로 작품들을 선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소속작가들로 팀을 이루어 구성된 공동작업의 창작방법은 부산의 많은 동인 미술그룹들과의 차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음은 <청미회>의 주요 활동이다.
1991.8 부산 청년미술인회 결성/1991.12 창립전-가마골, 그 사람사는 이야기(가톨릭센타)/1992.10 우리의 삶, 우리의 모습(가톨릭센타)/1993.8 우리의 삶, 우리의 모습(문회회관 중전시실)/1994.9 소모임 전시-여성회원들의 “결혼”주제전(가톨릭센타)/1995.10우울한 오후에 대한 보고서(타워갤러리)/1996.10 봄의 침묵-환경문제(스페이스 월드)/6월항쟁 10주년기념전 참가(가톨릭센타)/1997년.11 작은그림 전 (부산아트하우스갤러리)/기관지“청년미술” 발행
<새물결>
<새물결>은 부산지역내 대학 그림패 출신자들로서 <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해소 이후, 사회에 진출한 인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대학 졸업 이전에 사회진출모임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활동방향을 모색한 결과 <새물결>이란 단체를 만들게 된다. 당시 대학 그림패는 현장미술을 중심으로 주로 활동을 하였으며 이들은 <부산미술운동연구소>가 없어진 공백을 새로이 재창출하려는 의욕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화랑미술의 잠정적인 활동을 허용하면서, 개인창작과 공동창작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이들은 93년 겨울 사회진출 모임 이후 부산 진역근처에 공동작업실을 열어 개인창작을 집단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당시 참가자들은 최문영, 최미란,오현숙,김음미,윤진,박경효,홍삼화등 이였으며 그해 6월경?에 공동 작업실을 수영으로 옮기면서 “자작나무”라 이름지우고, 박혜옥,서성훈,안성순,강미애 95년에는 배인석,김원태등이 합류를 하게 된다. 그리고 94년 8월에 카톨릭센타에서 <새물결>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당시의 이들의 문제의식은 민중미술에 있어 민족적인 형식에 대한 연구와 그 지향에 있었으며, 북측미술의 소개로 인한 민족적인 공통양식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과거 민중미술의 성과를 토대로 민중중심적인 내용과 형식을 토대로 한 유효성과 혁신에 있었다.9)
9) 서성훈 인터뷰 / 2004년 9월(필자)
이들은 그 동안 부산지역 내에서 <부산미술운동연구소>가 주로 담당 하였던 현장미술의 전통을 함께 가져갔다. 때문에 이들의 목표는 다소간 많은 부담과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짐들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므로, 활동의 진행에 따른 취사선택적인 방향잡기의 측면을 자체에 가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들은 현장미술의 유효한 부분을 화랑에 옮기려는 듯, 개인적인 창작에서도 이런 영향 하에 창작이 모색 된 듯싶다. “현대중공업노조운동사”(카톨릭센타)나 환경을 주제로 “ 물 한 방울, 흙 한 줌 전”(부산,광주,서울,울산,전주순회전), 동학100주년기념전(전주,광주,서울)에 출품한 공동창작에 기반한 대작들은 이러한 성향에 따른 연구의 결과물들이다. 부산지역에서 <새물결>의 행보는 젊은 그룹 군 이면서도 지역미술운동의 전통을 지켜나가고, 또한 통일미술의 관점에서 미술의 내용과 형식을 창조하고 지켜나가려 했다는 점에서 <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후신으로서의 계보를 지켜나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부산미술운동연구소>의 해소 이 후 <부산미술운동연구소> 출신의 후세대들이 합류를 하였으며, 선배 진들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또한 달리 기관지를 만들지 않고 “미술연구”라는 계간지에 자신들의 활동과 창작보고서를 게재한 경우도 그러한 예이다. 다음은 <새물결>의 주요 활동이다.
1993 겨울 “사회진출모임”결성 / 1994.3 공동작업실 오픈 /1994.6월경 공동작업실 “자작나무”로 옮김 / 1994.8 새물결 창립전(가톨릭센타) /1994. 동학100주년기념전(전주,광주,서울)“ 물 한 방울, 흙 한 줌 전”(부산,광주,서울,울산,전주순회전)참가, “현대중공업노조운동사”(카톨릭센타)/ 1995.새물결전/1996.더 거칠어진 목소리 전(부산역 문화관)/1996. 6월항쟁 10주년기념전 참가(가톨릭센타)
<부산지역젊은미술가모임 “뚝”-이하 “뚝” >
<뚝>은 <새물결>의 해소 결정 이 후, 1997년 겨울, 지역 내 미술활동과 개인 창작만을 표방하며, 결성된 단체이다. 구성은 이전의 <새물결>회원들과 대학 그림패 출신의 새로운 회원들로 이루어 졌으며 구성원은 강미애,김영아,김웅기,박재열,박혜옥,배인석,오현숙,윤경아,정진영,황종모,여태육,김헌주,김선경,조경사,박명진,심은주,서운경,최지은,이경희등이다. <뚝>은 <새물결>이 추구했던 모든 부분을 인정하되 당면문제인 개인 창작의 정상화를 먼저 활동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당시 <뚝>의 소개 글이다.
사회가 변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변화와 안주가 공유하면서 굴러가는 것이다.
일단 우리는 변화의 쪽에 몸을 기대어 보지만 이 변화의 한계가 머리끝에서 아른아른 거린다. 80년대 이후 사회와 함께 하려는 미술의 사명을 자각한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지나가건만 -아직도 현실 사회와 시대 앞에서 미술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기만 한 것이다. '뚝'의 작가들이 가지는 창작적 활동과 고민은 이러한 범주를 고스란히 짊어지고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단지 조금 달라졌다면 이제는 지역과 함께 자신의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것이며 개인적 창작의 열의를 십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10)
10)연제공동체 신문 / 배인석 / 1998.8
<뚝>은 먼저 98년 7월에 IMF 시절을 살아가는 부산 사람들이란 내용의 '그대의 무거운 어깨 넘어 展'(부산아트하우스갤러리)의 창립 전을 치루면서 동인모임의 성격을 강화하고 대중적인 미술단체가 되기 위하여 회를 정비하였다. 내부적으로는 매달 편지형식의 소식지를 발행하여 회원들 간의 결속을 다지며, 시사성 있는 미술이론과 토론모임, 초청강연 등을 개최 하였고, 공동작업실(연산동)을 운영하였다. 이때의 작업실운영은 개별성과 공간을 보장할 뿐 그 이상의 운영은 아니였다. 또한 밖으론 미술대중 확보를 위한 준회원제의 운영과, 회칙에 의한 객관적인 회 운영을 체계화하는데 노력하였고 다양한 매체의(유화, 설치, 조소, 만화, 섬유등)작가들을 받아들이면서 부산지역의 젊은 미술동인단체의 면모를 만들어 가려 하였다. 창립 전을 소품으로 간소하게 열면서 조직운영과 창작의 부담을 가볍게 하고, 그 동안의 현장미술은 <꿈 공장>이란 사업체를 등록을 하여 수익사업화 하였다. 이런 운영의 성과로 다음해인 99년에는 창립 전 이후 좀 더 커다란 공간으로 옮겨 두 번째 회원전인 일상 전-씌여지지 않은 역사-(부산문화회관 중전시실)을 치루면서 개인 창작을 정상화한, 이 후 2000년에는 여성회원들로 이루어진 “여자이야기”전을 세원 갤러리에서 초대전으로 개최 하였다. <뚝>은 짧은 기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부산민족민중미술운동의 후발주자임을 인식하고 동인조직으로서 개인 창작의 발판과 지역미술의 활동 반경을 설정하려 노력하였으며, 2000년에 부산민족미술의 단일화를 위해 자진 해소 하고 전 회원이 부산민족미술인협회로 통합된다. 다음은 <부산지역젊은미술가모임 “뚝>의 주요 활동이다.
1998 뚝 창립전 ( 아트하우스 갤러리 ), / 99 일상전 ( 부산문화회관 ) , 부산 민주공원 개관 1주년 전 ( 민주공원 ) 참가 , 미술평론가 최 열 초청강연 갤러리/ 2000 세원 기획 4인전 “여자 이야기” (갤러리 세원), “뚝”정기전(갤러리 세원)
<학생미술운동>
부산지역내의 학생미술운동은 여타의 미술대학과 동일하게 보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 전개과정 또한 비교적 동일하다. 여기서 학생미술운동을 부산지역 민족민중운동사에서 거론하는 것은 몇 가지 의미와 그들의 많은 활동과 노력에 대한 합당한 가치를 기록하는것이다. 이는 1994년 과천에서 열렸던 민중미술15년 전에서도, 학생미술운동은 포함하지 않은 배제된 활동 분야였다. 80년 당시 생활미술의 한 분야로서 한글 티셔츠의 보급등 일상적인 생활화는 대학문화와 대학미술운동의 선도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투쟁현장 속의 시각물 등은 어느 사회단체보다도 표현의 풍부함과 자체생산력을 스스로 지니고 있었다. 또한 사회미술단체에서 현장을 중심으로 제작되어진 미술작품과 함께 대학미술패들의 사회현장지원은 그 활동의 반경이나 제작의 양을 보더라도 사회미술운동의 역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서 거론했던 <민미련>의 민족해방운동사 또한 지역별로 사회 미술패와 학생미술패가 중심이 되어 각각 1장씩 제작되어진 결과물 이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11)
11) 또한 주기적이고 정기적인 농촌활동과정에서 생산한 농촌벽화등과 학내 벽화를 비롯하여
학보와 교지의 지면을 활용한 삽화, 만평, 만화와 자체의 전시회 활동 등을 파악한다면 실로 많은 종류와 양의 활동이 이루어 졌음을 실감 할 것이라 본다.
대학미술은 사회미술인들의 예비단계 이면서, 전문분야의 직종을 이루는데 있어 불가분하게 거처가는 과정이 현실임을 볼 때, 학생미술운동은 미술대학내의 모순을 극복하고, 바꾸어 나가는 측면과 전문인으로서의 마땅한 진로의 고민을 담아 나가는 노력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학생미술운동은 한국사회에서 학생운동의 지위와 역할을 보더라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술대학학생들의 무기력할 정도의 활동이 기이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이전의 학생미술운동의 활동상을 알려 주는 정보도 극히 부족한 상태인데, 그나마 있다면 1946년 서울학생통일촉성회 산하 미술부 설치와 국립서울종합대학안 반대투쟁위원회 산하 서울대 미술대학 투쟁위원회의 투쟁 정도이다. 12)
12) 한국현대미술운동사/최열/돌베개/1991년/P.213
대략적으로 80년대 학생미술운동의 일반적인 전개는 학생운동과 결합하여 비전문인으로 구성되어진 그림패의 활동으로 비롯되면서, 여기에 미술대학의 학생들이 몇몇 결합이 되어짐으로서, 이 후 미술대학내의 그림패의 창립과 학교 간 연대체가 구성이 되거나, 미대학생회의 연합체가 병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전개에 예외 없이 부산의 학생미술운동 또한 87년 6월 항쟁을 거쳐 그림패가 상당부분 대학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대략적으로 87년 이후 부산여대(현 신라대학교)의 <우리>, 산업대(현 경성대학교)의 <실천미술>, 공업대(현 부경대학교)의 <그림마당 씨알>,동아대의<열린그림마당>,부산대의<산그림>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88년 당시 <낙동강>과 연대하여 민족미술학교라는 이름의 연합 수련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런 연대의 모임 속에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부산지역의 그림패의 연대조직 건설을 구상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는 이후에 생겨난 그림패에서도 지속되는 현상이지만, 그 이유는 그림패 각각의 성향과 역량의 차이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연대조직을 건설하기에 미루어 검토되었던 정파의 문제는 정파문제 이전에 고려하여야 할 연대문제의 커다란 테두리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게 만들었으며, 각각의 그림패에 주어진 사업과 활동에 반하여, 학교 간 활동의 높이가 상이 하거나 그림패의 역량이 상호간에 너무나 다른 실정 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부산지역대학미술패협의회>는 약친 대미협이란 이름으로 건준위를 떼지 못하고 상당부분 많은 시간을 지속하지만 조직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와 중에도 부산의 학생미술운동은 그 구성인자들의 영력을 전문화 시키는 노력을 보이게 되는바, 산업대(현 경성대) 회화과의 <실천미술><흙가슴>과 동아대 회화과를 출발하여 예술대 그림패로 전환한 <까끄라기>와 회화과의<민들레>등은 학과와 미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진 좀 더 전문적인 그림패를 만들어내는 성과를 보였다. 자료를 통해서 본 그들의 당시 고민은 이러하다.
만연해 있는 문화의 반민족성 반민중성을 극복하고 민족문화의 자주성과 전통성을 확립하고 미술을 위한 미술이 아님 삶에 기여하는 미술을 사회와 미술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파악, 이에 대한 우리들의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와 총체적 인식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모색을 위해 실천적 노력의 장을 마련하는 열린마당입니다.13)
13)한국현대미술운동사/ 최열 / 돌베개 / 1991년 참조-실천미술 / 회화학보3호 부산산업대 예술대 회화과 1988.3.20
*민족,민중 미술은 미술 전공학생으로 부터....(의의) *미술 전공인이 모여 전공인 속에서 미술운동 수행의 첫발 ........(생략)
#단대 동아리로서의 지위와 역할
예술대 전문 미술인들이 민족 자주 미술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는 집단으로서, 자주 미술가의 생성과 장성을 담보하여 자주 미술가로 만들어 낸다.
예술대 내의 대중적 공간의 확보 속에서 민족 자주 미술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해낸다 14)
14)까끄라기 문건 中/ 민족자주 미술의 선봉 그림패 ‘까끄라기’의 원론적 고찰을 정리하며/ 1990년
여기서 88년의<실천미술>은 그림패 창립 목적을 미대학생으로서 총론적인 미술운동의 실천을 선언한 반면 90년의<까끄라기>는 모순된 대학사회의 미술대학을 미술가들의 생산 처로 보아 미술대학을 변혁해야 된다는 그림패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한 부분 더 추가하게 된다. 90년 이 후 부산의 대학 그림패는 그 이전 보다 많은 수의 창립이 이루어지며, 학생운동의 시각물의 생산과 보수적인 대학교육의 비판, 사회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고 93년 대선 이후부터는 침체기를 맞아 해체 또는 활동 성격의 변화를 거쳐 지속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다음은 부산에서 활동했었던 학교별 그림패의 전체 명단이다.
부산대-<산그림><미술공동체>,동아대<열린그림마당><까끄라기><민들레><만화패 그림마을>,부산여대(신라대)<우리그림>산업대(경성대)<소나무><흙가슴><실천미술>교육대<그림마중>,수산대(부경대)<한라산>,공업대(부경대)<씨알>,동의대<만화그림연구터>
<가마골미술인협의회-이하 가미협>의 창립과 활동
1995년 6월 부산일보 중 강당에서는 <해빙><새물결><청년미술인회>등 주요 단체와 부산지역 민족미술인계열 50여명의 발기인들이 참가하여 가마골미술인협의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초대 대표로는 서상환, 초대 사무국장에는 설종보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눌원 갤러리에서 해방50년, 바람부는 들녘이란 부재와 함께 창립전이 열렸다. 당시 참여작가는 강미애,곽영화,권대근,김수진,김갑수,김덕진,김음미,김상화,김철룡,김재훈,김성민,김진희,김형대,노원희,류승선,문상호,박경효,박병제,박정련,박찬권,방정아,배인석,백원규,서상환,설종보,심점환,오현숙,윤은숙,이석금,이인철,이정순,이태구,전미경,정진연,최미란,홍삼화,홍성택,홍익종등38명의 작가들 이였다. <가미협>은 부산지역 민족미술계열 작가들의 총 집합체이면서 협의체적인 운영과 전국조직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단체의 역할을 하였다. <가미협>안의 소모임 단체는 <가미협> 창립 후에도 지속적으로 운영되거나 자연 해소를 하게 되는바, 2000년 <뚝>의 통합과 해소를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가미협>은 첫 출발부터 당시 미술연합(현 (사)민족미술인협회)의 부산지회로서의 활동에 염두를 두었지만, 각각의 구성원들 간의 통합에 대한 마찰과 정체성의 명료화에 대한 부족과 사업, 조직운영의 문제점을 갈수록 드러내게 된다. 때문에 발기인과 약 3개월 뒤에 개최된 창립전 참여 작가의 수적인 차이가 현저히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회원의 수는 줄어들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미협>은 부산을 대표하는 민족미술인들의 총집결체로서 위상을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주된 사업은 해마다 개최되는 정기전을 축으로 미술품유통을 위한 소품전등 서울지역과의 연합전인 통일전을 비롯 한정적인 기획전등을 개최하였다. <가미협>을 점검해 보면 이후 <부산민족미술인협회>또한 소급되는 문제지만, 일정정도 부산에서의 자기조직에 대한 위상과 그에 따른 운영과 사업에 대한 전략과 전술 수립이 부족한 가운데, 각 회원들은 개별적인 창작에 전념을 하는 중에 회의 결속력은 점점 떨어져 나갔으며, 회 체계는 약화 되어 갔다. 다음은 <가미협>의 주요 활동이다.
95.6 가마골미술인 협의회 창립대회(부산일보 중강당)/ 95.9 창립기념전-해방50년.바람부는 들녁(눌원 갤러리)/ 95.10 2차 정기총회(KBS 전시실-2대 대표:서상환/사무국장:설종보)/96.4 작은 그림전(갤러리 누보)/96.9 통일 염원 미술전(부산 문화 회관)/ 97.1 3차 정기총회(부산백화점 문화대학 강당-3대 대표:서상환/사무국장:설종보)/ 97.6 다시서는 6월(가톨릭센타 전시실)/97.11 작은 그림전(전경숙 갤러리)/98.2 4차 정기총회(설종보 작업실-4대 대표:서상환/사무국장:박경효/총무:이정자)/ 98.8 물위의 하룻 밤(부산시청 전시실)/ 98.12 작은 그림전(갤러리 누보) /99.2 5차 정기총회-5대 대표:양호규/사무국장:설종보)/ 99,9 전통과 현실의 지평에서(스페이스 월드)/ 2000.5 6차 정기총회(6대 대표:서상환/사무국장:배인석)<부산민족미술인 협회> 로 개칭 * 기획 전- 96 "봄날은 가고" 5 인전(정인 갤러리)/ 99 "신춘 기획" 4 인전 (갤러리 누보)
<부산민족미술인협회-이하 부산 민미협>의 개칭과 활동
<가미협>은 창립 이후 4여년 만에 운영의 위기를 맞는데, 이는 집행부의 세대교체에 대한 필요성의 제기와 회원들 간 합의의 불일치가 해체론으로까지 불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전국의 민미협이 독자적인 지역민미협을 결성하여 활동하는 과정에서 <가미협>의 문제는 매우 자연스러운 진통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는 현재의 몇몇 지역 민미협이 아직도 격고 잇는 문제이기도 하다. 해체론은 아주 간단히 새로운 대표를 맞이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내부에 가지고 있었다. 다소 수세적인 듯한 <가미협>의 명칭은 부산지역에서 민족미술을 확산해내고, 넓히려는 의도를 여전히 충족시키지 못하고, <가미협>은 회원이 줄어들어가고 운영의 어려움을 맞게 된 것이다. 2000년 당시에는 본부의 미술연합이 사단법인체로 전환하여 미술운동의 조직체가 변모의 움직임이 있었으므로 <가미협>또한 부산지회의 성격에 맞게 2000년 5월에 <부산 민미협>으로 개칭을 하고 회장에 서상환, 사무국장에 배인석이 선출되었다. 당시의 회원들은 김덕진,김형대,김진희,김지숙,노원희,박경효,박찬권,서상환,서아희,설종보,방정아,배인석,양호규,오현숙,이태우,이정순,이정자,전미경,정재학등이였다.이 후<부산 민미협>의 정관을 새로이 제정하고, 회 체계 정립과 <부산 민미협> 밖에서 활동하는 후배 군들인 <뚝>의 통합과 회원가입규정에 맞게 새로운 회원을 이입을 하였다. 당시 <뚝>의 인원들은 김영아,박재열,윤경아,정진영,황종모,김헌주,김선경,박명진,심은주,서운경,최지은,이경희 등 이였으며 새로운 회원은 송문익,이정화, 배천순, 류정실, 백성흠, 정예원, 임영선,손문상 등이다. 그리고 후원회원의 모집에 주력하면서 사업에 있어 영.호남전과 정기전을 국고와 시비로 치러내는 자체행정의 가능성을 보였지만, 실제적으로 <부산 민미협>의 활동에 있어서 <부산민예총>의 탄생은 여러모로 관과의 행정적인 활로를 터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부산 민미협>은 회체계의 정비와 더불어 기존의 전시사업과 기획 사업에 주력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민족미술인협회의 영남지역 대표 민미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음은 <부산 민미협>의 주요 활동이다.
00.6 민족-그 담론의 확장을 위하여(가야 미술관)/00,8 초청강연(원동석/21c지역미술의 발전방향/전경숙 갤러리)/00.11 고 양호규 회고전(부산민주공원) /00.11 제 3회 영호남 미술 교류전(부산 민주공원외 영호남 4개 지역 순회) / 00.12 7차 정기총회 *부산지역 젊은미술가모임"뚝" 통합 *(사단법인)민족미술인협회 부산지회 활동 의결/01,5 사이버 카페 개설(운영:황종모) / 01.8 통일-산점투시 33장면(부산민주공원)/ 01, 초청강연(김윤수/21c민족예술의 전망/민주공원,(사)민족미학연구소 주최)/ 01.10 부산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단체 미술분과 활동)/
01,11 제4회 영호남교류전 (부산민주공원,광주5.18문화관,울산문화회관,전주 정읍사예술회관,목포문화예술회관)/01,12 제8차 총회(7대 대표:송문익/사무국장:배인석/편집부장:윤경아)/02, 10 변화&불변전 (민주공원) 02, 12 제9차 총회(8대 대표:배인석/사무국장:전미경/편집국장:윤경아/기획국장:김형대/연대국장:박경효) 03. no war-평화를 밝혀라!(동보서적/인터넷)/ 합전(M갤러리) 03,11제9차 총회(8대 대표:송문익/사무국장:이경희)04.용천돕기전(부천 김덕수 난장)/6.15남.북미술전(인천)04,11제1차 임시총회(대표 업무대행:김형대/사무국장:이경희)/영.호남 교류전(여수)/ *기획전-00 민주공원 개관1주년 기념"부산의 삶과 정경"(민주공원) / 요산 문학제 시화전(동보서적 전시실)/고 양호규 회고전(부산민주공원)/"백화점 이야기" (부산민주공원) / 4회 영호남 교류전 개최 / 반전 평화-전국 전(민주공원)
마치면서
1960년 10월 <현실동인 제1선언>에서 85년 <민족미술협의회> 탄생 그로부터 3년 .1987년 9월 26일 부산 남포동 백색화랑에서의 <낙동강>의 출발은 이제 <(사)민족미술인협회>의 지회조직이며 <부산민족예술총연합>의 미술위원회로서 <부산민족미술인협회>가 현재진행형의 최종에 있다. 이 글이 부산지역 민족민중미술운동사라 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 글일 따름이고, 우리가 갈 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요즘엔 서울 인사동의 화랑 가를 서성이면서 재주 좋은 작가들의 작품을 여럿 발견한다. 하지만 이내 작품의 문제의식 이면에 있는, 사상의 알맹이에 동조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가 한창인 이 시절, 뭔가 버릴 것은 버리고 청산 할 것은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논쟁이 나는 논쟁이 아니라, 유아적인 우격다짐이듯 보이니, 국력의 낭비 같은 생각이 들 뿐이다. 미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뭔가 홀린 듯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그물에 어리석게 세상을 보는 작가들의 눈들이 결국 명작을 만드는 장애의 요인으로 작용 할 뿐이다. 이제 이 장애가 하나씩 치유되고 있는 형국이니 반갑기 그지없고, 조금은 살맛도 난다. 이제 조금 살 맛 나는 이 판에 <부산민족미술인협회>도 자신을 재점검하고 부산지역의 새로운 세대들에 의한 미술운동에 민감하면서 부산민족민중미술운동의 역사를 계속 주체로서 써내려가길 끝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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