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민 중 미 술 (03_01_artp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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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중 미 술  
1) 들어가는 말
   민중미술의 이론적 근거는 김윤수 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80년에 들어와 몇몇 이론가들에 의해 적극적 실천으로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는 원동석, 성완경, 최민 등의 비평가가 있음을 앞에서도 살펴본바 있다.   김윤수가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였다면, 원동석은 개념설정에, 성환경,.최민은 구체적 실천방향과 지침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중미술을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은 유홍준이다 <80년대 새로운 미술운동의 이념과 형식>은 80년대 전반기 민중미술운동의 구체적인 자료를 대신해주고 있다. 그는 “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은 이와 같이 기존 미술질서, 유미주의와 형식실험 모두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식과 삶, 사회적 현실, 역사의식을 동반한 위치에서 진행됨으로써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작품들”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럼 80년대의 민중미술이 어떤 태동을 시발로 하여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80년의 「현실과 발언전」과 그 뒤 이은 「임술년전」,「두렁전」,「시대정신전」,「횡당전」 「젊은 의식전」,「삶의 미술전」 등 활발한 소집단 미술운동이 전개되던 1984년까지의 전반기와,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 대한 당국의 탄압 이후 ‘민족미술협의회’조직결성과 더불어 사회변혁 운동으로 점차 전환해 나간 1980년대 후반의 시기로 구분해 이해할 수 있다. 민중미술이란 명칭은 주로 이 후기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초기는 한국적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예술의 사회적 기능 및 현실인식의 회복, 대중매체의 위력에 대한 새로운 주목, 서술적 신구상 양식과 역사적?사회적 주제의 등장, 전통적 민중적 도상학의 차용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후기는 민족 민중의 개념에 입각한 사회변혁의 조건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인식이 강조되면서 점차 학생,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 여타의 사회조직 운동과 결합되는 야상을 보였다. 그 결과 민중미술은 걸개그림, 깃발그림, 벽화, 판화, 포스터, 출판미술, 생활미술 등 갤러리 아트의 한계를 벗어나, 대학가, 노동현장, 노상집회 등 정치운동의 현장과 대중생활을 파고드는 여러 새로운 형식과 매체를 개발하고 미술의 사회문화적 효용성을 실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  성완경은 평하기도 한다.

예술과 사회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듯이,  민중미술이 왜 강한 운동성을 갖게 되었는지, 80년대의 한국사회적 모순 요인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다음을 통해 짚어 볼 수 있다. 첫째, 쿠데타 이후 30년에 걸친 군부정권의 성장주도 정책의 결과 높은 산업적 생산성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으나, 다수의 소외계층이 생겨났고 군부정권의 도덕적 타락은 일반 국민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극도로 훼손시켰다. 둘째, 나라의 삶 전체에 깊은 충격과 상처를 남긴 냉전에 미국이 직접 개입되어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 분단의 원인이된 38선 확정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2차대전 도발국인 일본이 치루어야할 분할점령을 미국의 군사.정치적 계산으로 한반도에 전가..현재까지 분단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셋째 미국의 우산 아래 정권을 유지해온 군사정권의 정치적 탄압은 상당수 국민의 강한 저항을 유발 했고(특히 제주 4.3봉기, 광주 5.18, 미문화원사건등) 미국에 적개심을 품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중’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역사의 무대로 전면 돌출되었고 한국 현대사의 변화 및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실천들은 (과학,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 걸친)80년 5월 광주사태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분출하였다.   위의 세가지 사회적 모순요인들은 문화운동의 한 측면으로서 민중미술이 80년대 자리매길 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적 특수상황을 잘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민중미술의 모태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1980년 벽두부터 우리 정치사에 큰 회오리 바람이 일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회오리 바람」은 모처럼만에 맞이한 민주정치로 다가가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가로막은 역풍이었기에 더욱더 기억에 생생하다. 정치적 난기류에 휩싸여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80년, 그해의 미술계에는 우리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의미심장한 사건이 터졌다. 즉「현실과 발언」 (창립회원 : 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임옥상, 주재환)의 출현이 그것이다.  

  「현실과 발언」은 특히 젊은 평론가(비평가: 원동석, 최민, 성완경, 윤범모)들이 구성원으로 참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이색적인 동인모임이다. 종전의 평론가의 위치는 작가와 선행적이거나 후행적 역할이었는데, 이런 관행을 깨뜨리고 동행적 내기 동반자적 관계로서 예술의 모든 문제를 동동으로 탐색한다는 새로운 평론의 정립에 몰두하는 것이 그들의 자세였다.  위 「현실과 발언」의 참가 비평가 외에도 김윤수, 유홍준, 최열, 이태호, 심광현, 라원식, 이영욱, 박신의, 이영철 등이 민중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 후원자요, 지원자로 그 조직화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각자의 주제의식이 거칠거나 점잖거나 익살맞고 해학적이고 침울하며 엉큼하기도 하고 매개형식도 만화 사진 광고 포스터 신문지 화선지 장난감등을 따붙이고 오려내고 벗기는 마치 팝아트처럼 매체의 현실감을 맛보는 작업을 한다.  이들은 미술을 사회와 정치, 그리고 도시문명과 관련시켜 총체적인 삶의 반영으로서 자리매김하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말하자면 이들 세대의 논리 한복판에 현실모순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새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강도높게 공표되었다.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 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한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중략) 우리들 자신도 대부분 이제까지 각자 외롭게 고민하는 것만이 최선의 자세인듯 생각해왔으며 동료들과의 만남에서까지 다만 편의적이고 습관적인 데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공동적인 문제해결과 발전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려 하지 않았나 합니다. (중략) 미술의 참되고 적극적인 기능을 회복하고 참신하고도 굳건한 조형이념을 형성하기 위한 공동의 작업과 이론화를 도모하자는 것이 우리의 원대한 목표가 되겠습니다."    

  위의 취지문은 일반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있지 않지만 미술의 현실성 내지 사회성을 언급하고 있다. 미술을 밀폐된 순수공간 속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적 영역으로 흡수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따라서 새로운 미술의 지향점은 작가적 개성을 강조한 고립주의를 배격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발언방식으로서의 미술이 기능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70년대 미술의 순수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미술을 현실인식의 주체로, 또 그러기 위해 소통의 발언방식을 개발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데에 가장 큰 무게를 싣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만큼「소통의 방식의 개발」문제에 대해「현실과 발언」그룹은 민감했다.  그들은 어떤 매체일지라도 그것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현실인식을 고취시킬 만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선택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여곡절 끝에 치루어진 동산방 화랑에서의 창립전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성완경의 사진콜라주, 윤범모의 판화, 김건희의 상업광고의 차용, 주재환의 만화 등등. 나중에 이들의 이러한 다양한 시각매체에 대한 관심은「매체확장」이라는 문제로 진전되기는 하지만, 벽화·출판·판화·사진·만화·회화·조각·비평 등을 통해 확대시킨 이들의 실험성은 단순한「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를 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동석, 윤범모와 함께 비평가로서 이 그룹에 참가하면서 논리를 제공해온 성완경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삶과 문화전반의 현실의 넓고 다양한 측면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림이라는 현실에만 집착하고 있으면 결국 그림에 관한 그림밖에 그릴 수 없다. 그림의 현실을 넘어서 사회라고 하는 보다 넓은 공동체적 현실  의 장으로 눈을 돌려 그 속에서 미술의 역동적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미술이 사회의 유기체적인 구조와 기능의 장에 장식의 기능으로써만이 아니라 근원적인 기능으로 참여해야 한다. (중략) 만화, 광고, 일러스트레이션, 건축, 사진, 영화 등 넓은 범위의 새로운 시각현실에 주목하고 미술표현의 장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그 뒤를 잇는 제2세대 민중미술과 달리, 모더니즘 유형에 따르면서도 한편으로 비판적 형상미술의 양식 속에서 형식언어의 세련도, 완성도보다는 형식언어가 지니는 사회적 힘을 찾고 보여주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 단체의 구성원들이 사회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정치적 억압으로 생기 잃은 사회분위기를 풍자적, 공격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들의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현실묘사는 기존화단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술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다는 입장으로 명암이 갈리웠다. 우리 화단에 일찍이 이처럼 구체적인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정치적 문제를 노골적으로 거론한 바가 없기 때문이겠거니와 미술은 모름지기「높은 품격」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 기존 화단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현실과 발언」회원들이 보여준 전위성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과 발언」그룹은 이후 이태호, 강요배, 이청운, 박불똥을 신입회원으로 받아들여 조직을 보강하면서 크게는 소통의 회복과 적게는 반형식주의 또는 반모더니즘을 표방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활동방향을 꾸준히 정립해갔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풍자한 것, 전통미술의 형식을 적용하여 민중이념을 내세운 것, 그리고 지식인의 주관적 상황의식을 표출한 것 등으로 나타났다. 이때「현실과 발언」이 취한 방향을 정리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그 다음이 문화환경에의 주목이며, 마지막으로 정치의식의 고취이다.  

 첫째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은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다. 문화의 중심이 활자매체에서 시각매체 위주로 변경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들이 산업사회의 현실을 응시하게 된 것은 지극히 온당한 논리의 수순이었다. 이들이 미술출판물로 발간한《산업사회와 미술》 에서 산업사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늠할 수 있다. 산업화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는 이미지의 체험에 있어서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엄청난 양으로 생산 공급되는 이미지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중략)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자극의 총량은 방대해졌고, 그 종류와 복잡성은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같은 새로운 이미지의 환경은 사람들의 감각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 체계적으로 지배하기까지 한다."말하자면 대중문화적 현실에 대한 응전으로서 이 그룹의 성격을 틀짓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문화환경에의 주목이다. 도시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서 이 점이 한층 가시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1981년 7월 롯데백화점 내 미술관에서 개최된「도시와 시각전」은 대량생산에 의한 대량소비의 제반 사회적 현상이 두드러진 도시환경과 그 속의 인간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던 것은 자세한 관찰을 요하는 사항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온갖 사회적, 경제적 힘들이 얽혀 있는 거대한 망상조직으로 존재하는 도시의 실체를 벗어내려는 시도를 통해 낙후성을 면치 못했던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한층 높혀주면서 이제까지 존속해왔던「소박」과「관조」로서의 리얼리즘의 굴레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길을 비로소 터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떠한 이념의 표방 없이 묘사와 재현 위주로 일관하던 아카데미즘과 별개로 사회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풍자, 비판의 리얼리즘을 모색함으로써 그들은 이전의 형상미술과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이 도시적 삶, 문화와 같은 실제적 문제를 상정했음은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서문으로 붙여진 최민의 글은「현실과 발언」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압축해낸다. "도시는 속도와 변화이며 갈등이다. 도시는 서울이나 부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촌 깊숙이까지 침투해 들어가 있다. 놀이터인 동시에 생존의 싸움터인 도시는 광기이며 매혹이고 엄습하는 그림자이다. (중략) 우리는 그 혼돈과 다이너미즘에, 그 탐욕과 허영에, 군중적 환락과 흥분에 집단적으로 마취된 익명의 원자들로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만약 미술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유기체적인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민이 말한「유기체적 반응」이란 결국 도시가 강요하는 삶의 상투성과 획일성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 그리고 그 심층을 해부하고 직시하는 용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도시환경에의 비판적 성찰」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현실과 발언이 취한 경향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정치의식의 고취이다. 그중에서도 88년 개최된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그림마당 민, 1988. 11)는 85년부터 급속하게 고조되기 시작한「반미의식」에 합류해 이 땅을 정치적, 사회문화적 신식민지로 파악한 이들의 정치관을 극명하게 표출한 대표적 사례에 해당하며, 이외에도 군부독재, 반공논리, 그리고 분단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이들은 뚜렷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게 된 경위에는「80년대적 상황」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출범한 시기는 광주항쟁이 무력에 의해 진압된 직후였으며, 또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5공화국의 비민주적 강압통치에 대한 저항이 사회운동으로 확산되던 무렵이었으며, 생존권 쟁취를 위한 민주운동, 인권운동이 뜨겁게 타오르던 말 그대로 격변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격변의 나날과 함께 커간「현실과 발언」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특정 정치인을 풍자하고 민중에게 가해진 잔학행위, 땅에 떨어진 정권의 부도덕성을 직설적으로 발언하며 또 재야 사회운동에 합류하여 정치상황 및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데까지 이르게 했음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 했던 작가적 양심, 사회적 도덕심이 작용했던 탓이 크다.  

80년대 중반 이후「현실과 발언」이 침체한 것은 사회변혁운동과의 연대투쟁이 강렬해지고 미술운동의 실천 체계화를 위한 운동조직의 요구가 비등해짐에 따라「민족문화의 건설과 민주화운동에의 적극 기여」라는 취지로 85년에 결성된「민족미술협의회」시기부터인데 아이러닉하게 이때부터 조직은 강화되었지만 창조적 역량은 현저하게 감소되기 시작했다. 이 점은「민족미술협의회」등 조직활동 속으로 그룹의 힘이 분산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만 더 궁극적으로 보면 기본문제를 미술에 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두었다는 점, 따라서 작품생산에 소홀해지고 질적 빈곤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민중미술의 주체세력 또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지향한 신진세대에 자리를 이양해주지 않으면 안되었음을 각각 의미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현실과 발언」이 우리 미술에 일정부분 기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왜소해진 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고「미적 탐닉」대신「가담으로서의 미술」, 말하자면 사회현실에 주목하면서 날로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을 다양한 시각매체의 개발과 활용, 그리고 동인지 발간, 토론회 개최, 그림일지 발간, 벽화제작, 각종 출판물 발행 등 활동영역의 확대를 통해 미술에 대한 기본 인식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깨어있는 미술」을 향해 부단히 정진해갔다는 점 따위일 것이다. 그리하여 80년대 미술의 흐름은 급기야 내용, 메시지, 그리고 발언을 존중하는 사회성이 강한 정치미술, 저항운동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3)‘민중미술 15년전 추진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민중미술 15년의 역사를 3기로 구획하고 있다.  

A. 초기 : 소집단 운동과 민중미술의 형성(1980~1984)

B.  중기 : 전국미술인 조직의 결성과 미술운동의 확산(1985~1989)

C.  현재 : 창작의 결실과 진전(1990~1994)

A.  초기 (소집단 운동과 민중미술의 형성 : 1980-1984)

80년대 벽두부터 일어난 소집단 미술운동은 기존 미술계의 폐쇄성에 대한 도전이자 미술 속에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미학을 확보하기 위한 조형적 검색작업이 이뤄진 시기이다. 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임술년, 두렁, 서울미술공동체 등 소집단 활동 작업들이 여기에 요약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1970년대 유신체제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자아와 현실을 찾아 나섰던 작가들의 개인적 고뇌들도 포괄돼 있다.앞부분에서 이미 「현실과 발언」에 대하여 충분히 살펴보았기에 여기에서는 1980년의 두 동인 「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를 상호 비교하면서 초기 민중미술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1980년「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두 동인은 당시의 답답한 미술의 풍토 속에서 올바른 세계관, 창작방법, 그리고 작가의 사회적 활동과 관련하여,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의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크게 환기 시킨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부재와 기존 미술계에서 익힌 모더니즘의 표현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뿐 아니라, 중산층을 주요 수용층으로 하는 전시장 공간에서의 성과에 머물고 말았다는 여러가지 지적을 받는다.  창립동인의 한사람인 최열은 “광자협이 사회 모순에 적극 도전하는 것에서 미술의 제일차적 의의를 찾고 있는 반면, 현발의 경우는 참신하고 굳건한 조형이념을 위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출발점의 상이함이 지난 10년간의 현실주의 미술사에 있어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상화 되었다”고 지적한다.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는 다수복제의 가능성, 비용의 저렴성, 제작의 용이성, 형상의 강렬한 표현성을 주요 특성으로 하는 판화라는 매체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것을 매개로 하여 민중교육운동을 펼쳐나가고자 하였다. 그 결과 진솔하고 신선한 시민판화들이 산출되었고 이것은 대중 주체의 미술창조 가능성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며 시민미술학교는 미술의 민주와 대중화의 물꼬를 활짝 열면서 목포, 이리, 전주로 확산되어 갔다.「현실과 발언」으로 현실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를 취급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되자 많은 소그룹이 그 뒤를 이어갔다.「현실과 발언」과 아울러 소통문제, 대량소비사회에서의 이미지 문제, 소외와 물화의 문제를 검토한 것은 82년 창립된「임술년」(창립회원 박흥순, 이명복, 이종구, 송창,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이었다.   ‘임술년-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전’은 82년에 출발 2회의 전시회를 가졌던 동인모임으로서 ‘지금 여기서부터’라는 상징적 이름을 내세우며 비교적 연령이 비슷한 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동인들은 거의  극사실주의 묘법을 통하여 냉정하고 객관적인 현실이나 우화적 상징의 현실성을 드라마화하는 것이 특색이다.  자기의 감정은 은닉된 채 드러나는 현실의 이미지는 불안, 위기, 공포로 가득찬 세계적 절망감의 드라마이다.  

  이들은 그룹의 목표를 "시대정신, 리얼리즘의 정신을 이념화하고 불확실한 과도기적 상황을 형상화"하는 데에 설정하면서 문명비판, 역사의식의 성찰,「공존하는 토양의 형성」을 기하기 위하여 주로 사실주의 기법으로 이러한 주제를 형상화해갔다. 이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았던 것은 현재성, 시대성을 반영하는「시대정신」이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자신들이 그룹명칭으로 택한「임술년」을 "우리가 출발하는 1982년이라는 현재와 (중략) 분단된 남한의 면적을 지금 이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런데「현실과 발언」과「임술년」은 두 그룹 모두 표현양식상 서구적 방식에 의존했다. 전자가 콜라주, 사실묘사와 같은 리얼리즘 기법에 따랐다면, 후자의 경우, 70년대 초 미국에서 풍미했던 극사실주의를 따랐다.  이와 같이 초기의 민중미술은 고유한 체계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서구적 양식의 추종에 즉각 이의를 제기한 것은 전통미술의 중요성을 모토로 내건「두렁」그룹이었다.  

82년 10월, 김봉준, 장진영, 이기연, 김준호(본명:김주형)가 모여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했다.  학창시절 탈춤 풍물 연극을 하며 민속문화부흥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논과 밭을 애워싸고 있는 작은 둔덕’을 뜻하는 「두렁」이란 말을 붙인 것은 민중들의 삶의 공동체현장에서 사랑받고 지지받는 미술을 꿈꿔왔기 때문이다. 83년 7월 두렁은 “미술을 위한 미술에 매이지 않고 민중 속에서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획득해내는 살아 움직이는 미술- ‘산그림’을 지향한다”  고 밝히며 창립예행전(7월 7일~17일, 애오개극장)을 열었다.(참여작가:김봉준, 장진영, 이기연, 이연수, 김준호, 오경화)   그후 김봉준, 장진영, 김준호는 5폭의 괘화를 협동하여 공동창작을 했다.  이 괘화는 기독교 장로회 대회(83년 9월)때 내걸려졌는데 전체 주제는 ‘땅의 사람들과 사람의 아들’이었다. ‘두렁’동인들은 이러한 현장검증을 통해 괘화의 힘을 확인한 다음, 대중집회의 주제나 핵심내용을 농축하여 시각적으로 웅변해냄으로써, 모임의 취지나 의의를 강렬하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대중집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이같은 큰 그림을 걸 괘(掛), 그림 화(畵)자로 풀어 ‘걸개그림’이라 이름짓고 이를 목적 의식을 갖고 확산시켜 나가기로 했다.  

84년 4월 두렁은 열린 공동작업으로 작업의 민주화를 꾀하고 전달과 수요방식의 적극적인 개방을 통해 대중과의 만남에 주력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 문화역량에 동참하고자 한다”    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열림굿과 창립전(4월 21일-26일 경인미술관)을 펼쳤다.  이른바「노동대중을 지향하는 전문미술인 조직」을 자처한「두렁」은 이러한 계급적 상대성, 차별성에 주목, 미술을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선전도구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한편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미술의「선별적 계승」을 다른 하나의 과제로 상정했다. 민화, 불화, 불교조각, 장승, 탈, 풍속화, 진경산수화 등에서 우리 전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제 작업 속에서 이러한 문제를 꾸준히 검토해갔다. 이러한「두렁」의 성격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창립취지문’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시대의 민중미술(민족미술)에 대한 연구와 수련을 통해 민중의 미적 전통을 민중사적 차원에서 계승  하는 한편, 작업의 민주화를 위하여 공동작업을 강화해 나가고, 현장을 중심으로 개척하고자 합니다. <문화활동자>로서 미술의 생산과정(창작, 매체개발, 교육, 전달, 수요의, 전과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개인 창작가의 몰사회성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현실과 발언」이 취한 서구적 표현법과 그 이면에 내재한 개인적 내면성, 자의식, 존재의식에 반대하면서 특히 민족적, 민중적인 전통미술을 발굴, 계승하고 대중적인 표현양식을 개발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말하자면「현실과 발언」이 보인 개인의식, 서구적 표현양상, 전문성이 소시민적 계급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그에 대처할 방안으로 노동자, 농민의 미의식을 투영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두 그룹을 좀더 일반화해서 보자면,「현실과 발언」이 중간층적, 서구적, 전문가적, 현실비판적이라면,「두렁」은 기층서민적, 민족적, 아마추어적, 체제변혁적 성격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구별지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초기 미술운동은 사실주의를 복원하는 시기이고,  1983년에 접어들어서는 민족ㆍ민중미술로서 사실주의 창작방법론을 확보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었다”고 최열은 적고 있기도 하다. 1983년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사회현실 및 세계사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그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으로 된다.특히 1983년과 1984년 사이에는 많은 낯선 것들이 뒤섞여 버렸다.   많은 낯선 것들이란, 유화국면,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컬러TV방영, 미제 수입품, 레이건의 스타워즈 선언, 소련이 스타피스라는 대응, 미문화원 방화.점거사건들, 집단적인 열망,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확신과 제3세계적 관점의 확신, 세계질서의 전복, 혁명가들, 깃발들(중략)민주화운동청년연합, 해직교사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6인열사 추모대회, 청계노조 합법성쟁취대회 , 민정당사 점거투쟁,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를 위하여, 대규모 집회의 좌충우돌이었다.   1983년은 제 5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많은 미술인술이 협의체적 질을 갖는 미술운동기구를 발전시킬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 이름을 ‘미술공동체’로 결정 ‘성남-미술학교’(1984.1.23~29)(문영태, 최민화, 홍성담, 김정헌, 원동석,홍선웅, 옥봉환, 최열, 채광석), 청년미술학교’(1984.2.6.~12)(위의 사람 외에 신경림, 김윤수), 등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1983년은 특히 지방문화권에서 홍성담, 최열등에 의해 출발한 ‘시민미술학교’는 시민의 자발적 창조의욕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민중미술의 개설이라고 볼 수 있다.  ‘시민미술학교’는 그 의의를 이렇게 표명한다.  “이제는 시인만이 시를 쓰고 화가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바람직한 예술은 다른 사람들의 생존의 체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서로 공유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이제부터 예술은 기능이나 전문성이 문제가 아니라, 한 시대의 총체적 삶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비전문적인 민중 스스로의 취미에 의해 미술에 대한 소외감을 벗고 나아가 자기들 삶을 위한 적극적 표현욕을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문화의 창조와 향유의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민중은 소비적 피동의 객체에서 생산적 능동의 주체로 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현실과 발언」,「임술년」,「두렁」과 같은 그룹의 출현과 활동은 단지 미술운동의 차원에서  머문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크게는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가 지녀온 개인적, 집단적 정치활동의 폐쇄, 그리고 군부독재 아래서 현실문제를 다루는 것을 금기시해왔던 문화적 환경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상황및 문화 상황이 민중미술 작가들에 의해 사회변화와 보편적 해방에 대한 폭발적인 에너지로 바뀌어 마침내 분출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흐름에 대해 미술비평가들은 「새로운 구상화」(김윤수),「새로운 미술」(유홍준),「신구상 회화」,「신형상회화」, 그리고「후기형상주의」라는 다소 막연한 이름으로 불리워졌지만, 명칭이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맨먼저 「민중미술」과「민족미술」로 나누어 분류한 사람은 원동석 이었다.  

민중미술 회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진전에 따른 변화과정을 비판적으로 형상하고 그 전망을 계급의식적 관점에서 확보하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같은 공통인식이 결국 그 뒤의 소집단운동을 촉진시킨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의 불만과 억압된 미술환경에의 변화를 촉구하는 대대적인 행사는 가히 폭발적이었다.「젊은의식」,「횡단」,「시대정신」,「실천그룹」,「에스파 동인」,「일과 놀이」,「지평」등 많은 미술단체의 기획전이 잇따라 열렸다. 「현실과 발언」 「임술년」등과 비교하여 볼 때 「젊은 의식전」, 「횡당전」, 「실천그룹전」 은 기질이 각기 다르다.  (중략) 이들의 지배적 경향은 다분히 반예술적 열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에게 사회현실은 야유, 조소, 경멸, 풍자, 익살, 희롱기가 넘치는 대상으로 자리잡으며, 예술의 성격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작품보다는 작가의 제스처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외에도 오윤, 신학철, 임옥상, 김정헌, 홍성담, 김경수, 이종구, 이철수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활동양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것은 1984년「삶의 미술」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이 전시에는 젊은 작가들이 집결하여 무려 1백5명이 총 133점의 작품을 출품, 관훈·아랍·제3미술관 등 세 군데에서 동시에 전시를 가졌으며,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워크숍을 갖는 등 1980년도 중반을 결산하는 대단원의 활동을 과시하였다.  

B. 중기 (1985~1989) : 전국미술인 조직의 결성과 미술운동의 확산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정치적 아방가르드”   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집단미술운동에서 민중미술로 이행하여,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결성과 1988년 민족민중미술 운동전국연합 결성 침 이후 미술운동이 조직화되고 정치, 사회적 문제와 깊이 연계되면서 지역현장 활동으로 확산되어간 시기의 열매들이다. 사회 속에서 미술의 기능이 고양되고 사회운동의 고조에 따른 현장미술이 등장하여 걸개그림 벽화 생활미술 판화 등이 왕성하게 제작된 시기로 전시장미술을 벗어나 공장, 농촌, 집회장과 가두로 확장된 시기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  1985년에 접어들면서 군사정부의 끊임없는 탄압이 더욱 거세어 졌다.  5월 광주에선, 항쟁 5주년을 맞아 광범한 대중선전을 펼치고자 제작했던 홍성담의 판화 2천점과 5주년 기념전시관에 설치된 김경주, 이준석의 <광주항쟁백인신장도>를 경찰이 탈취해 갔다. 곧 7월에는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 대해 경찰이 무차별 탄압을 가했다.  ‘두렁’은 무크지 <민중미술>의 발행을 준비하는 한편, 노동현장 순회전을 기획했다.(85년 3월), ‘구로동맹파업 해고노동자 돕기 기금마련 및 노동운동 탄압 항의 집회죴때 가두전을 열고자, ‘두렁’동인들은 공동창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구로동맹파업 해고노동자 지원집회는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고, 차선책으로 ‘한국미술, 20대의 힘전’(85년 7월 13일 아랍미술관)에 그동안 창작한 노동문제관련작품-이야기그림<노동일기>,<큰 힘주는 조합>,<역사는 우리의 것>등 20여점 ?을 출품했다. 경찰은 문공부장관의 민중예술 비판발언 에 힘입어 ‘힘전’에 출품된 여러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강제철거하고 미술관을 폐쇄한 다음 박영률, 장명규, 손기환, 박불똥 그리고 ‘두렁’이 창작한 문제작품 26점을 압수해 갔다.(85년 7월 20일)  전시장 폐쇄 및 작품철거 그리고 작품압수에 항의하는 청년작가 19명을 경찰은 강제로 연행해 갔으며, ‘힘전’전시 기획자인 ‘서울공동체’의 손기환, 박진화, 그리고 ‘두렁’의 김우선, 장진영, 김준호를 장기구금하여 심문하였다. 탄압대책위원회-홍선웅, 문영태, 김봉준, 홍성담, 최민화, 최열, 라원식, 유연복 등 13명으로 구성-가 만들어졌으며, 청년작가들의 항의농성이 계속되고, 창작과 표현의 자유 침해에 항의하는 미술인 236명 연명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85년 7월 26일)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 민중미술진영은「맞불작전」으로 대처하면서 한편으로 조직 정비를 강화하고 세력 확장의 시기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85년 "건강한 민족문화의 건설과 민주화운동에의 적극 기여"라는 목표로 출범한「민족미술협의회」는 민중미술 운동의 결집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협의회는 또한 그 산하에 전용전시공간인「그림마당 민」을 두어 미술적 성과를 수렴하고 관의 탄압에 대처하여 자율적 전시를 조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단체의 결성의의라면 무엇보다도 산발적, 소집단적, 분산적 차원에 머물렀던 민중미술운동을 통합시켜 집약된 에너지와 노선의 정립, 일관된 방향설정을 갖게 했다는 점일 것이다.  

「민미협」 은 80년대 전반기에 보인 기존 미술과의 싸움을 보다 대중적 차원에서 전개해가는 과제, 달리 말하면 사회, 체제, 그리고 정치투쟁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반제국주의」와「분단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최한「제1회 통일전」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같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보면「민미협」이  출범되면서 민중미술진영에 일정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민미협」 자체가 미온적 성격을 지니며, 또 이 단체가 기성작가 중심의 운영체제로 주도됨에 따라 젊은 작가들이 반발, 이탈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 민중미술 내의 신구세대가 지닌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민미협」의 주체인「현실과 발언」세대가 비록 모더니즘의 그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기는 하나 전문성, 개인성, 예술성, 그리고 현실비판을 지향했음에 비해, 신세대는 운동성, 정치성, 계급성, 현실변혁과 같은 사뭇 다른 의식을 지녔고, 미술운동에 있어서도 이념적 동질성과 조직적 역량 그리고 전술의 중요성을 뚜렷이 강조하는 등 세대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상이념적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전문작가의 차원을 넘어서 전문적인 운동가로서의 변신을 서슴치 않으며「정치투쟁에 복무하는 문예」를 실천에 옮겼다. 이와 같은 실천행위 중 가장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걸개그림」이었다. 이미 <두렁> 등의 그룹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한 걸개그림은 가두투쟁, 노동투쟁 등의 현장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그 실천적 효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걸개그림의 주요 특징이라면, 대중집회의 선전효과를 기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속하게 제작되는 속성을 지니고 그림의 내용면에서도「서사적 형식」에서「전형적 형상」에로의 변화 등 차이를 보여왔지만 상당수는 도해적인 것이 많아 정치투쟁에는 어느정도 효과를 거두었지만 온전한 예술의 성취에는 많은 의문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87, 88년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민중미술 진영은 선거기간동안 노정된 정치적 입장과 노선의 차이가 얽혀 자체내 분열양상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분열양상은 미술 본래의 문제와 관련해 나왔다기보다는 변혁노선, 정치적 입장, 조직론의 차이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이때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만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제2세대 민중미술 작가, 이론가들은 종전의 소수 지식인 중심의 운동방식에 한계를 일제히 지적하면서, 다수 민중 중심으로 양적인 확산(사회운동, 노동운동)을 거두자는 최초의 발상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학생운동과 접목하면서 사회과학이 제공한 지식에 얽매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중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노동계급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비약과 노동계급의 문화건설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모순이 먼저 청산되어야 한다는 급진론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물변증법적 인식의 관점에서 자본계급과 대립한 노동계급을 민중의 주체라고 보는 시각, 또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개발된 민중성→계급성→당파성으로의 연결이 2세대 민중미술운동의 중심개념으로 놓여지게 되었다. 소시민적 관행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는「민미협」이 민중적 실천의 요구로부터 이탈함으로써 더 이상 정치투쟁을 같이할 수 없다고 여긴 신세대들은 88년「민족미술운동전국연합건설준비위원회」(이하 “민미련”으로 약칭함)라는 긴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고 지역미술운동과 학생미술운동을 기반으로 하여 강령적 차원에서 정치사상적, 미적 입장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이 단체의 결성으로 민중미술은 양분되었지만, 전국에 산재한 미술인들과 단체를 그 산하에 둠으로써 지역/중앙의 차별화를 해소하고 또한 현장중심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실천적 파급력을 증진시켰다는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는 강령의존적, 조직복속적 한계를 노출시키는 역기능을 몰고 왔다.  고 서성록은 말한다.  

   그러나 최열은 민미련이 출범하며 민미협과 일정한 갈등을 보인바도 있지만 “민족미술진영은 전국 민족미술가 단일대오를 표방하는 민미협과 현장활동을 지향하는 청년미술가 연합체계를 내세우는 민미련이 중증적으로 배치된 짜임새를 갖추었고, 1990년에 접어들어 갖자 강령을 채택하고 조직을 개편해 나가는 가운데 독자적인 질을 갖는 사업의 내용과 형식을 체계화해 나갔다.(중략) 1980년대 후반기에 펼쳐진 민족민중미술운동의 활력은 이런한 중층구조로부터 얼마간 부추김을 받았다. 그 이념과 미학, 창작 및 대중활동의 모든 범주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확산을 보였다” 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전환기적 상황과 동구 사회주의 몰락 등 빠른 정세변화에 반응하여 민중미술은 이에 대처할 방법틀을 모색해왔는데 그중 대표적인것중의 하나가 2세대 이론가들에 의해 제기된「당파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당파적 현실주의란 예술의 정치화를 목적하는 말로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예술의 진리성을 대신해준다"는 관점을 극렬 옹호한다.

  1980년대 초반 민중미술의 목표가 반독재와 반모더니즘이었고, 그리하여 이러한 모습을「민중성」과「민족성」개념으로 발전시켰다면, 1980년대 후반의 목표는 계급 해방론 또는 계급 투쟁론의 실천으로 집약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당파적 현실주의」를 "목적의식적 지도원리로서 노동자계급의「당파성」을 미술운동의 지도이념으로 확립하는 것"    으로 정의 내리고, 현실을 "가장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미술형태"로 규정하는 데서 잘 확인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파적 현실주의는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엄격한 계급 구분하에 계급 투쟁론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문화를 건설할 것을 꿈꾸었다.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적 소유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음으로 해서 획득된 자신의 완전한 자유로움과 노동과정의 사회하에서 획득된 자신의 철저한 사회성을 기초로 하여 우리의 전체 현실을 이데올로기적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바라볼 수 있도록 조건 지어져 있다. 동시에 노동자 계급은 타계급 민중의 현실적 해방이 없이는 자기해방이 불가능하도록 조건 지어져 있다. 다시 말해 타계급 해방이 자기 해방의 전제조건이 되고 있는 사실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전체 민중의 공통이해를 실현할 실질적 책임자로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동일한 관점은 심광현의「노동자계급적 당파성」이라는 개념으로 다시금 정리되어 지지 되는데 그는「노동자계급적 당파성」이야말로 "민중구성원의 주축인 성장하는 노동자계급의 미적 이상이자 그러한 미적 이상이 정치적 표현으로 각인된 계급적 성격을 (중략) 객관화하는 미학적 범주"   라고 치켜세운바 있다. 말하자면 미술 자체를 구호만 앞세운 이론, 그것도 철저하게 사회주의 체제의 예술론에 물든 형태의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미 동구에서도 실효성을 상실한 패러다임을「최상, 유일의 모델」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C.  현재 (1990~1994) : 창작의 결실과 진전

  90년대 들어오면서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함께 민중미술이 현장미술에서 전시장미술로 복귀하면서 개인의 창작이 다시 예술적 성과로 수렴되는 시기이다. 이는 민중미술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세대에 따라 경향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양식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민중미술 15년:1980-1994” 는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시회 주최가 제도권인 국립현대미술관이기 때문이다.  성완경은 이 전시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기성 미술계는 민중미술을 자신과 같은 직업의 세계 속의 하나의 공공적 실재로서 인준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 중략 ) 민중미술은 이처럼 한국의 미술계에서 시민권을 가진 미술이 아닌 채로 존재해 왔다. (중략) 민중미술을 음해한 것은 군사 정권의 사직 당국이나 문화부 교육부 등 관련 부처 산하의 공무원들 또는 언론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상당수의 미술인들이 스스로 ‘내면화한 검열관’으로서 공개적 ㆍ비공개적으로 민중미술을 이단시하거나 비방했으며 때로는 점잖은 방식으로 ‘물을 먹이기’도 했다. 사법경찰보다 더 가혹하게, 진지한 ‘예방 비평’의 어휘를 구사해 가며 민중미술들을 단죄한 평론가의 공개강연을 1980년대초에 들은 적도 있다. (중략) 이같은 냉소적 무시를 견디며 발전해 온 민중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민중미술의 정신과 미학 그리고 예술성을 당국으로부터 공인받는 상징적 사건’으로 규정 할 수 있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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