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혁에 앞장 섰던 민족민중미술(이하 민중미술이라함)이 업그레이드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만큼 사회가 성숙한 것도 사실이지만 미술인이 사회현실로 부터 스스로 소외 당할 만큼 우리나라 사회나 국제정세가 안정되어 있지는 않다. 게다가 사회주의권의 붕괴 후 일극체제로 재편된 세계의 모습은 절망스럽기 까지 하다. 그러나 요즈음 미술계의 움직임은 미술인이 사회적 방관자의 자세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구체적 피해자로서 그 권익을 도모하기 위해 창작 작업을 등한시 한 채 미술주변적인 단물에 매료되어 있다고 하면 잘못된 진단일까? 물론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미술인의 본연인 창작 생산물이 빈곤에 허득임을 감안하면 민중미술 전성기 이 후 10여년의 암흑기를 거친 지금의 미술계 움직임은 심히 우려스럽기 조차 하다.
1.
민중미술이 군사정권의 자욱한 최루탄가스 속에서 탄생한 만큼 지금은 소멸 되었어야 옳을지도 모른다. 사실 민중미술진영의 많은 미술인들은 각 처에서 모인 전사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원대 복귀하듯 떠나갔다. 민중미술을 한국 근대미술사 최초로 기존 미술계의 구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새로운 미술운동이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화려한 수식어에 비해 민중미술인 각자는 어떤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같다. 그랬다. 민중미술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서히 자멸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도한 미술의 역사가 그전의 미술적 성과를 자양분으로 하여 발전해 나간다고 볼 때 민중미술의 숨 넘어가는 헐떡임을 그냥 지켜만 보는 미술계는 그 미래가 암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미술을 비판하던 미술도 적대적인 미술도 민중미술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미덕조차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칠흙 같은 밤은 찾아왔고 어느 듯 10여년이 지났지만 미술계는 여전히 새벽을 기다리기엔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기왕지사 언젠가는 찾아 올 새벽을 기다리며 민중미술의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든지 아니면 불사조 같이 스스로 부활해야 한다. 늙고 지친 민중미술을 이대로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은 미술계는 물론이거니와 사회변혁 운동에도 별 도움이 안 될 것은 자명한 것이다.
민중미술이 죽든 부활하든 사회변혁의 적극적 개입자로서 그리고 민중의 대변인으로서의 미술은 있어야 된다는 당위성에 별 이론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민중미술의 기본정신이라면 이제 민중미술인은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기존 민중미술 진영이 현시대의 새롭게 변모된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기에 벅차다면 기꺼이 그 자리를 비워줘야 할지도 모른다. 민중미술이 종교가 아닌 다음에야 민중미술이란 말이 영원하길 기대할 필요 까지는 없는 것이다.
미술계가 밤거리를 헤메는 동안 국내적으로는 참여정권이 들어서고 거물간첩 김철수가 세간의 희롱거리일 정도로 성숙 했지만 지구상에는 역사책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던 제국의 모습이 현실로 나타났다.. 또 다른 제국을 꿈꾸는 나라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 영향권의 틈바구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세계는 거미줄 같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과거와는 달리 세계의 흐름을 컴퓨터로 개개인이 볼 만큼 물적 토대도 바뀐 것이다. 그러나 미술계는 물론이고 진보진영이라는 민미협 조차도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은 고사하고 미술인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비록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동초 같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민중미술이 민미협 회원이 생산한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는 이젠 난처한 것이다. 최루탄에 대응하여 돌맹이 던지는 것이 행위미술인 시대도 아니거니와 민중미술로 얼마든지 분류될 수 있는 진보적 성향의 작업들이 비 민미협 회원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 반면 민미협 회원 이면서도 도저히 민중미술이라고 말하기엔 껄끄러운 작업들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미술조직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의 집결체 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진보진영 미술의 마지막 보루인 민미협도 지난한 삶을 살아왔던 만큼 내부사정도 만만치 않다. 민미협이 발족하여 한창 주가를 올릴 땐 민중미술을 영어로 minjung art로 번역 했는데 그 이유가 민중미술을 영어로 마땅히 번역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민중미술의 높은 자존심이 베여 있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몇 번의 번역 과정을 거쳐 얼마 전에는 민족미술인협회를 The Korean people's artists association으로 번역했고 지금은 영어 표기를 없애 버렸다. 도도하기 까지 했던 minjung art가 맥 없는 보통명사화 한 Korean people's art로의 변천은 실로 엄청난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중미술은 변질 했던 것이다. 다만 아무도 변질 했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이유를 새삼 따진다는 것은 잔인하다. 여전히 진보진영 미술을 담보할 조직이 필요했고 민미협이 무너졌다면 진보진영 미술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맥만 유지해 오던 민중미술이 이제 양적으로 질적으로 업 그레이드 되야 하듯이 민미협도 변해야 한다. 아니 새로 태어나야 한다. 새로운 진보진영의 미술이 새로운 조직으로 태어나려할 때 기꺼이 그 먹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새벽을 여는 민중미술의 아름다운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새로운 진보진영 미술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10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미술판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 대상이 미술인회의이다. 미술인회의가 우리나라 미술계를 주도하기에 충분한 회원 수를 확보하고 갓 출범한 단체이어서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잠시 살피고 가지 않을 수 없다.
2.
수백 명의 유료 회원을 확보하고 2003년 9월 6일 창립한 미술인회의의 출범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출범 후 구체적인 활동 성과물이 없는 상황에서 뭐라 말하긴 이르지만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창립선언문에는 지금 미술인들의 주요 관심이 어느 곳으로 쏠려 있는지를 가늠할 만한 내용들이 함의 되어 있다. 미리 밝혀 두지만 글쓴이가 신생단체인 미술인회의가 구체적인 활동을 통한 성과물이 없는 상황에서 예단하여 딴지를 걸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미술계의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기에 신생단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창립선언문(http://www.misulin.org 참조)에서 일단 눈여겨 볼 것이 무엇보다도 미술 직능단체로서의 기능을 중점적으로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초연할 자유가 없는 미술인이 사회의 제 문제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미술인에 국한된 부분만 발췌하여 접근하려는 거대한 미술인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나 10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미술계의 움직임의 화답치곤 궁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미술계의 새로운 조직 출현의 바램이 암흑기와 같은 10여년의 시간 동안 미술인 각자가 그동안 갈고 딲았던 내공의 어떤 결실의 집합체로서 혹은 그 돌파를 위한 조직을 기대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인회의는 미학적 입장과 이념적 성향을 미리 넘어서서 미술 직능단체로의 구실에 충실하겠다고 선언 하므로서 미술의 본연인 미학논쟁이나 사회변혁 논쟁의 물꼬를 틀어 막아 버렸다. 이는 어려운 처지의 진보진영 미술을 더욱 고립화 시키고 미술계의 고질적인 구습으로의 회기를 조장할 우려가 충분하다. 모처럼 형성된 미술조직이 진보적 미술인의 설자리를 배제 시키고 미술인 권익만을 추구하는 편협한 조합 형태로 간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좀 더 속내를 살펴보자. 미술인 공동 실천 목표 첫 줄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확보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미술인에게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매우 익숙한 것이다. 사실 미술표현이라는 것이 글자와 달라 헌법에 위배되는지 안 되는지를 판단 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쉽지 않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미술인 회의가 굳이 ‘헌법’이라는 토를 달아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소지를 만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미술사라는 것이 반동의 역사일 수도 있을 터인데 반동과 합법은 뭔가 상생의 단어가 아닌 것이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미학적 입장과 이념적 성향을 뛰어 넘어’ 조직을 이끌어 나겠다는 것인데 이 말은 반체제적인 성향의 미술이나 신자유주의에 안티를 걸 수도 있는 다양한 성향의 미술인의 권익을 미술인 회의는 사전에 소외 시키겠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일이 합법적 공간에서 체제 순응적이고 무기력한 미술인의 권익신장에 힘을 모으는 것일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시류에 편성한 구태의연한 미술정치 집단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스스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짧지 않는 미술계의 기다림과 국내외 정세를 생각 한다면 미술인회의가 비록 직능단체를 지향한다 할지라도 그 편협함에 안타까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짤막한 선언문을 통해 많은 걸 진단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 법 대로만 살아지지 않는게 인간사이고 보면 구체적인 활동과 성과물의 누적을 통해서 미술인회의는 그 진정한 전체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3.
암흑과도 같은 무기력한 미술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단체의 탄생을 미술인 모두가 기대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새로 탄생한 미술단체는 미술적 욕망을 선택하기 보다 미술인의 권익신장이나 복지를 선택 하므로서 암흑의 밤을 더욱 연장 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게다가 우려해 마지 않았던 미술 생산물은 없고 미술정치만 있는 상황을 고착화 시키고 있다. 진보진영 미술인의 관심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미술인 회의가 일단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 같다. 아니 미술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민미협 역시 무기력 했던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보면 미술인회의는 허약한 진보진영 미술에 위기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운 죽음에 앞서 우선 불사조 같이 부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활해야 할 이 시점에서 민중미술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8년 민미협 역사에 제대로 된 논쟁 한번 없었으니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분업적 입장으로 볼 때 본격적인 미학 논쟁이나 이념적 논쟁은 비평, 평론가 부류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몫을 다하지 않고 마치 난파선의 쥐 모양 일치감치 모두 떠나 버렸다. 망망대해의 난파선 격인 민미협 이지만 아직 엔진은 식지 않았다. 난파하게 된 원인이야 이미 밝힌 대로 지난한 삶 속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해법은 괄목할 만큼 변한 국내외 정세와 사회여건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 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진보진영 미술의 앞날을 담보하는 것이기에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18년의 민미협 역사에서 그나마 평론가 부류들이 남겨 놓은게 있다면 90년대 초반에 잠시 거론 하였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진 ‘맹아(萌芽)론’ 정도가 아닌가 한다. 군사정권의 마지막 쯤으로 기억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중구난방 식 민중미술의 해석에 이론적 정립의 필요성 때문에 나온 말이다. 글 뜻대로 ‘이제 새싹이 돋아났다’는 것인데 이는 민중미술이 실체는 있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 추이를 지켜보자는 표현 다름 아니다. 그 후 맹아(萌芽)는 잘 알다시피 성장을 멈췄지만 민중미술인은 여태껏 맹아가 스스로 자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다. 이 ‘기다리고 있는 꼴’을 유식하게 ‘정체성에 대한 묵시적 합의’라고 말하고 있다. 도전 세력도 없고 돌파구도 찾지 못한 10여년 동안은 이 묵시적 합의가 효력을 발휘 했겠지만 새로운 미술단체의 탄생이 민중미술의 위기의식을 부추기에 충분 하므로 정체성에 대한 묵시적 합의가 그 약효를 다했다고 봐야 한다.
한참 늦었지만 민미협은 그 맹아를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 활발하게 논의를 하든지 아니면 말라 비틀어 졌을지도 모를 맹아 대신 진보적 성향의 미술인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버전의 프로그램을 설계하는데 노력 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 확립의 과정은 무기력 하면서도 방만할 대로 방만해진 민미협의 자체 정화과정의 원동력이 될 것이며 민중미술의 본영이며 진보진영 미술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 한다.
지금 민미협이 개혁위를 구성하여 조직 재건작업에 한창이다. 조직재건은 새로 건설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다 한다. 조직재건을 위해서 많은 것을 점검하고 뜯어 고쳐야겠지만 정체성 논의가 그 중심에 있지 않으면 재건된 조직은 어쩌면 아무 것도 담보해 내지 못하는 의미 없는 조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직재건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하여 다시 한번 ‘새로운 저항의 유형’을 만들자는게 글쓴이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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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에 바란다.(민중미술의 높은 단계를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