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생각해 보는 곽희 화론 <강의 개요>
1.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
2. 삼원법과 산점투시
3. 정신의 풍경
4. 시와 서예와 그림은 본래 하나이다
5. 평원산수―평담의 미
곽희는 북송의 대관(大觀)산수화를 절정으로 끌어올린 불후의 화가이다. 그는 또한 동아시아 산수화의 미학적 토대를 마련한 『임천고치(林泉高致)』라는 탁월한 화론을 남겼다.
『임천고치』에서 제기된 이론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 삼원법(三遠法)이라는 산수화의 투시법이다. 시선이란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시선의 형태 속에 그 시대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삼원법(고원, 심원, 평원)의 ‘원(遠)’은 자연의 리듬 그리고 우주의 무한과 합일하고자하는 시선이다. 그것은 노장사상과 위진현학이 추구했던 정신경계인 ‘현(玄)’과 ‘무(無)’의 다른 이름이다. 반면 서양의 투시원근법은 기본적으로 ‘근(近)’의 시선이다. ‘근’의 시선은 가까이에서 대상을 분석하여 그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시선이다. 투시원근법의 소실점은 풍경을 지배하고자 하는 화가의 눈, 즉 주체의 눈이 위치하는 자리이다. 이 주체의 눈은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타자)을 양적인 질서로 재편하면서 풍경을 지배한다. 이러한 것은 양적인 분석을 통해 자연과 타자를 지배하고자 했던 근대 서양의 욕망관과 상응하는 것이다.
곽희의 삼원법과 투시원근법이 결정적으로 차이 나는 점은 삼원법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3개의 시선이 아니라 산수와 만나는 일련의 과정 속에 하나의 리듬으로 결합된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 삼원법은 고정된 투시원근법과는 달리 이동하는 시점인 ‘산점투시’가 된다. 산점투시는 자연이라는 대상을 부분으로 쪼개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소요하면서 자연을 총체적으로 체험하는 자의 시선이다. 이는 <조춘도>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잘 나타나 있다. 산점투시는 주체도 대상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흐르는 기(氣)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임천고치』에서 말하는 산수는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정신의 풍경이다. 다양한 산수의 미적 관조와 체험이 화가의 정신 속에서 통합되고 숙성되어 나타난 이미지인 것이다. 이것을 ‘사의(寫意)’라고 한다. 서양의 사고에서 주체(정신)/대상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칸딘스키가 정신의 풍경을 그리려 했을 때 그는 대상의 묘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대상도 주체도 한 기(氣)의 흐름이다. 대상의 형상도 주체의 정신도 우주의 리듬, 자연의 기로 통합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곽희가 제시한 풍경은 대상의 형상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의 풍경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주 자연과 합일하는 화가의 정신 수양이 있어야 한다.
동아시아 산수화의 또 다른 특징은 그림 속에 시와 서예가 통합되는 총체적 예술이라는 것이다. 화면 속에 실제로 제화시(題畵詩)라는 시가 있고 그 시는 또한 숙달된 서예 작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표현된 산수의 정취는 매우 시적이며, 그리고 산수를 그리는 선들이 또한 서법의 선과 다르지 않다. 서법도 화법도 선에서 시작해서 선으로 끝난다. 산수화는 손으로 연출하는 선의 춤이다. 그 선이란 다름 아닌 기(氣)의 흐름인 것이다.
곽희가 제시한 미학 가운데 마지막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평원산수에서 느끼는 평담의 미이다. 평담은 노자와 장자가 중요시한 염담(恬淡)과 소박에서 기원한다. 평담은 평범하고 담담함 속에 지극한 우주의 조화를 담고자 하는 풍경이다. 평담은 산수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정신 경계를 담고 있다.
『임천고치』에서 곽희가 전개한 산수화의 이론은 이후 미술사에서 전개된 많은 화론(畵論)과 회화에 이론적인 틀과 미학적인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또한 미술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행으로 치닫는 오늘날,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담고 있기도 하다.
==================
<주제어>
1. 삼원법(三遠法)
곽희가 그의 산수화와 이론서 임천고치에서 정립한 동아시아 산수화의 투시법. 산 아래로부터 산을 위로 올려다보는 것을 고원, 산의 앞 쪽에서 산의 뒷면을 넘겨보는 것을 심원, 근접한 산에서 먼 곳의 산을 바라보는 것을 평원이라고 한다.
2. 산점투시(散點透視)
동아시아 회화의 중요한 특징으로써 특히 장권(長卷)의 거대한 산수를 그릴 때 많이 적용되어진다. 대상을 다원적으로 투시함으로써 대상의 다양한 면과 심지어 시간의 변화와 화가의 성정(性情)의 변화까지도 한 화면에 표출한다.
3. 투시원근법
선원근법이라고도 하고, 일점투시원근법이라고도 한다. 15세기초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에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수학적 법칙을 발견하여 몇 가지 기본원리를 수립한 이후 마사치오 등의 화가들이 회화에 적용하기 시작한 기법으로, 일정한 시점에서 본 물체와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멀고 가까움을 느낄 수 있도록 평면 위에 표현하는 투시법이다.
4. 정신(精神)
정(精)과 신(神)이 결합된 개념으로써 장자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정과 신은 모두 기(氣)의 특정한 양태이다. 기가 가진 생명 형성력의 근원적 양태가 정이라고 한다면 기의 신묘한 작용력을 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신은 육체와 분리된 데카르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가진 생리작용까지 포함한다.
5. 평담(平淡)
노자와 장자가 중요시한 염담(恬淡)과 소박과 유가의 간이(簡易)함을 중시여기는 경향에서 기원하고 송대의 시인 매요신이 하나의 독립된 풍격(風格)으로 종합하였다. 평담은 평범하고 담담함 속에 지극한 우주의 조화를 담고자 하는 풍격이다. 회화에서는 평원(平遠)산수화로 표현되었다.
===============================
<더 생각해볼 문제>
1. 『임천고치』에서는 산을 높게 보이고 강을 멀리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가운데 여백을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곽희가 활약했던 북송대 이후, 여백은 산수화의 매우 본질적인 특징이 되었다. 반면 서양 회화는 기본적으로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 속에 함의되어 있는 심미관과 세계관의 차이는?
2. 동아시아 예술사에 있어서 산수화론에서는 장자의 영향이 컸던데 반해 음악에 관한 악론에서는 공자를 위시한 유가의 영향력이 현저하였다. 산수화가 장자의 정신을 구현하게 되고 음악이 유가의 정신과 상통하게 된 문화사적 맥락을 찾아보자.
3. 동아시아 산수화에서 나타나는 정신의 미학이 오늘날 가질 수 있는 예술적, 나아가서 문명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4. 동아시아 산수화에서 강조되어온 미와 오늘날 시나 그림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추(醜)의 미와 숭고미를 창조적으로 결합할 방법은 없을까?
5.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더러는 동방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었다고도 한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동방르네상스가 일어난다고 하면 동아시아 전통 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더 읽을 책>
1. 곽희, 『곽희의 임천고치』, 신영주 옮김, 문자향, 2003.
2. 서복관, 『중국예술정신』, 권덕주 옮김, 동문선, 2000.
3. 주은우, 『시각과 현대성』, 한나래, 2003.
4. 이성희, 『무의 미학』, 새미, 2003
----- 강사 이성희
학력 : 부산대학교 철학박사
현 : 시인, 동의대학교 강사.
논문 : 『장자 철학의 기론적 토대』외 다수
저서 : 『허공 속의 등꽃』(신생) 외 다수
,
|
hit: 50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