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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을 보는 눈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연구위원장)
여순항쟁과 비슷한 시기에 민간이 학살을 경험했던 제주는 4.3이란 아픈 상처의 치유를 위해 가장 먼저 예술인들이 앞장서 나섰다.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정부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시절 문학과 미술이란 예술로 승화하여 잃어버린 기억들을 처절하게 복원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물론 기억 속에서 애태우며 감춰두었던, 사건을 겪었던 세대까지도 직접 이야기하는 것 보다 더 강열하고 빠르게 당시의 실상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여순 10.19 사건의 진실을 시민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준비하던 입장에서 제주의 예술인과 제주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수∙순천에도 제주의 예술인처럼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참혹하게 짓눌린 역사의 상흔이 더 커서 짓밟힌 풀잎이 일어서듯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벌써 세 번째 여순항쟁 창작단의 여순그림전이 열리게 되었다. 올해는 더 많은 이야기가 그림을 통해 당시의 진실들을 보여줄 것이다. 이를 위해 참여 작가들은 한 해 동안 여순사건의 광풍이 휩쓸고 지났던 전남의 동부지역 곳곳의 마을과 산하를 돌면서 작품의 모티브를 모으고, 경험자의 증언을 듣고, 토론하고 고민하였다. 스페인의 게르니카의 참상을 보여주었던 피카소나 키오스섬의 학살을 보여주었던 들라크루아의 그림처럼 역사화는 어떤 매체보다 강하고 사실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재현하여 보는 사람의 가슴에 작가의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
여순항쟁이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캔버스에 담아 이야기를 전달할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순항쟁 안에는 표현하는 용어만큼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여순사건 전문연구자인 김득중 박사의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지난 50여 년간 사용되었던 ‘여순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만 보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성격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여순병란’은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이란 뜻으로 14연대 군인의 사건으로만 보는 시각이며, ‘여순봉기’는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양상을 설명하여 당시 정부도 사용했던 용어이다. 여순군민항쟁(여순항쟁)이라고 했던 당시의 신문기사도 비슷한 함의를 갖는다 하겠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겪은 입장마다 천양지차로 바라보았다. 봉기에 참여한 14연대 군인의 시각이 있고, 진압하던 군이나 경찰의 시각이 있으며, 여수시에 살았던 이유로 졸지에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시민, 친구 따라 가입한 남로당원이 어느 날 여순사건 부역자로 둔갑되어 목숨을 잃었고 이도 모자라 가족까지 빨갱이 가족이 되어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이 있으며, 빨치산의 강요로 산으로 짐을 지고 갔다는 이유로 죽었던 가족, 입산자 가족이란 이유로 알지도 못하는 은신처를 밝히라며 고문당하고 죽어야 했던 부모와 아낙들, 빨치산으로 변장한 군인들 앞에서 대한민국만세가 아닌 공화국만세를 불렀다 하여 학살된 마을 주민, 이와는 반대로 진압군에 동조하였다고 빨치산이나 좌익으로부터 습격당해 희생된 우익인사의 학살 도 있었다.
죽음의 형태도 총살뿐 아니라 산골짜기에 암장하거나 돌을 메달아 바다에 던져버린 수장, 죽창으로 찌른 척살, 고문하거나 때려서 타살, 일본도로 목을 베어 효수, 노끈이나 줄로 메달아 죽이는 교살 등 여수와 순천의 주민이면 누구도 할 것 없이 초법적인 상황에서 온갖 죽음의 전시장과도 같은 세월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2005년 5월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통과되고 한국전쟁 전후를 통해 전국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문제를 조사하여 진상을 밝히는 과거청산의 역사적 발걸음이 시작되어 진행 중에 있다. 이를 이루기까지 반세기가 더 지난 6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실질적이며 내용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도, 50여 년 전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났던 인권유린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쳐 진실을 알리고, 가해자가 반성하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여순사건 58주기 "역사적 재조명展"은 지역미술가들의 예술적 상상력과 역사적 통찰력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상처받은 전남 동부권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평화와 인권 그리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를 문화예술 활동으로 승화시키려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기성세대와 전후 세대 간의 불필요한 갈등과 편견을 순화함으로써 지역 민중들의 이상이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족적 항쟁정신으로 촉발된 사건임을 인식할 수 있는 상생의 시각을 공유함으로써 지역의 역사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전시장을 찾는 모든 분들이 여순사건의 진상을 좀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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