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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예술사업의 이해
김봉준(화가, (사) 오랜미래문화연구회장)
‘지방문화예술사업의 이해’는 오늘 저에게 주어진 제목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전 이해를 구합니다. 지방은 중앙의 대비되는 개념으로 행정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중앙에 종속되는 지방이라는 말인데 이제는 지역이라는 말로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시대변화를 따른다면 지역이라는 개념이 보다 더 적합합니다. 문화의 지리적 산물을 인정하고 서로 대등한 지리적 영역으로 부르자는 것이 지역론입니다. 예를 들어 뉴욕이나 워싱턴 문화가 중앙문화이고 캘리포니아나 아리조나 문화가 지방문화가 아닌 것처럼 지역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주도가 변방문화이고 서울이 중앙문화가 아닌 이치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지역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고 지역간 균형발전을 서로 원하며 지역의 정체성과 개성을 찾자고 합니다. 이는 1987년 이후 민주화시대를 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근대적 사고입니다. 그러하니, 여기서는 지역이란 말로 바꾸어 쓰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지역문화예술사업의 이해를 몇가지 주제로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문화와 지역문화의 이해, 예술과 지역문화예술의 이해, 지역문화예술사업의 방향과 과제로 풀어나가겠습니다.
문화란 무엇인가
흔히 문화는 인간의 삶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문화란 말이 아주 넓고 깊게 쓰여서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표층과 심층문화를 함께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층은 눈에 보이는 시대문화라면 심층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원형문화입니다. 시대문화는 역사와 시대와 사회집단의 성격에 따라 변하고 흘러가는 문화라면 심층문화는 문화인류학적으로 풀면 인간 본성들이 발현하는 형식으로 집단무의식적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전자가 역사적 특성과 교육이념에 따라 의식적으로 학습되고 훈습된 것이라면 후자는 학습시키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본성의 무의식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물학에서는 행동의 유형이라고 합니다.즉 사랑에 빠졌다든가, 어머니가 제 자식을 끔찍이 위한다든가, 슬퍼서 울고 기뻐서 웃고 좋아서 기분 내고 배불러 만족하고 불쌍하다고 연민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끌리고… . 하는 것들이 모두 본성의 발현인데 민족마다 독특한 민족형식을 가지며 나타납니다. 한 사회의 문화는 이 두 영역, 표층문화와 심층문화의 교호작용으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지역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전파와 유입을 인정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생태지리적 산물이라는 점과 마을이 지역의 뿌리라는 점입니다. 고대국가 형성과 근대국가 조성 이전부터 내려오는 저 신석기시대의 씨족 공동체문화에서 마을문화(1)는 시작되고 마을이 연집해서 지역을 이룹니다. 그래서 지역문화는 마을문화 없이 형성 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지역문화뿐만 아닙니다. 마을은 문화의 기본 속성인 공동체성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 공동체가 실상이든 가상이든 문화의 본질적 구성이 ‘마을’입니다.
주1) 신석기 이전에 이미 인류문화가 나올 것은 다 나왔다. 이야기(신화) 의례 노래 춤 상징 등 직관적 사고로 비유(은유, 환유, 상징)문화를 창조한 인류는 다른 동물종과 다른 문화적 진화를 이룬다. 구석기시대 이미 시장과 신화와 의례의 문화가 출현한 것은 동굴과 암벽의 글그림 아이콘이 말하고 있다. 교환가치를 만든 시장까지도 이때 동굴 속 교류에서 나왔다. 그 후 신석기시대 농경문화의 발명은 노동의 분업, 계급분화가 시작되지만 철기시대 도시국가문명과 다르다. 모계중심의 안정적 생활문화, 지역 공동체의 작은 신(여신, 조상신 토템신), 문화종 다원성의 확대, 노동의 분업화와 생산수단 발달 등이 모두 마을문화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인류족의 문화원형은 대부분 이 때 완성된다. 전인류사에서 1/100도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진 오늘날의 철기문명은 남성지배에 의한 수직적 계급지배를 강화하여 거대한 도시문명을 이루지만 오늘날 도시문명 위기의 근원이나, 국가주의의 상습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마을문화를 청산한 도시문명의 직선적 진보에서 비롯된다. 자연에 대한 정복과 소유의 개념은 이때부터 나타난다. 오늘날 다시 마을문화원형을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철기문명에서 비롯한 국가주의문화의 위기를 보완하고 재고시켜 줄 문화원형의 광맥이 여기에 숨은 채로 들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마리아 짐부타스가 말하는 신석기시대 여신문명이 마을문명이다. 어머니 대지신화, 환웅과 웅녀의 신화도 마을문화이다. 마을의 연대로 나라를 형성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도 아직 거대한 남권지배 권력문화와 권력종교는 탄생하지 않았다. 흔히 지금을 문명전환기라고 하는 것은 남권지배의 철기문명 전체에 대한 성찰과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 지역의 문화원형을 마을신화 중심으로 놓고 펼쳐보면 이런 그림지도가 입향설화, 지명설화, 통과의례, 신화상징들을 주목하여 마을문화원형을 중심으로 그린 문화지도입니다. 2009 문화부 후원 한국여성연구원 주최 ‘양성평등 지역문화확산사업’ 프로젝트에서 제출된 그림. 김봉준 붓그림.)
(지역문화예술의 본질적 특징은 삶의 멋을 중시하는 풍류문화입니다. 이는 지역문화에서일관성 있게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지역문화원형입니다.)
지역문화의 특성
지역문화는 성격상 분류를 하자면 시간적, 공간적 특징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공간적 특징은 생활성, 전통성, 향토성, 시대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삶의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생활양식으로 나타나고, 계절이나 인생 통과의례를 반복해서 따르게 된다는 측면에서 전통성을 지니며, 문화는 물질문화나 정신문화가 대게 생태지리적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향토성을 가지며, 그 지역의 특별한 산업, 교육, 군사, 공공사업 등 시대적 삶의 조건에 따라 조직적 특성화가 나타납니다. 거기에 몸담은 사람들- 어린이, 학생, 청소년, 군인, 공무원, 교수, 상인 등등의 독특한 시대성을 나타내며 저마다 지역문화의 한 몫을 합니다. 따라서 지역문화는 그 자체로도 문화적 다양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지역문화의 특징은 시대성보다 생활성 전통성 향토성이 대도시 문화보다 두드러지게 나탑니다. 그것은 근대적 노동분화가 상대적으로 적고 미분화종합적인 삶의 문화가 강합니다. 이는 풍류문화라고 불려왔습니다. ‘예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삶의 멋 그자체이고 삶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고상한 경지’가 풍류문화입니다. 그래서 예술(術)이라고 부르기보다 예도(道)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문화는 시간적 특성에 따라서 분류해 보면 전통성, 근대성, 탈근대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생각할수록 복잡합니다. 전통이란 선사시대 인류문화를 품고 내려온 것이니 그 어느 시대 전통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지역문화 현실이 다릅니다. 문화종의 보존과 선택, 이해와 계승과 해석에 따라서 전통은 상당히 다른 모습의 지역문화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당대의 문화 주도층이 남성적 유교문화 전통을 강조하느냐, 여성적 살림문화전통을 주목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고, 아랫마을 저잣거리 상인문화를 중시하느냐 윗마을 산촌 농민문화를 주목하느냐에 따라 지역문화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몇 년 전에 유엔에서는 생물종 다양성과 함께 ‘문화종다양성’ 보존을 세계문화헌장으로 채택하면서 인류족들의 모든 문화종의 가치를 대등하게 존중해야 함을 강조하고 인류문화 보존을 역설한 헌장이 채택된 적이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생태종을 보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촌 인류족의 문화종도 보존되어야한다는 지론입니다. 지구촌 인류족문화는 그 지역의 생태지리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사라지는 인류족 문화원형으로 보존이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인류족의 소멸과 문화흡수로 함께 사라지는 인류족 언어만 하더라도 매년 수십 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호주의 정부를 대표해서 호주수상이 서구인의 대륙침략 과정에서 호주 원주민에게 끼친 수백 년 동안의 문화침탈과 서구문화로의 개종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원주민의 전통을 무시하고 서구문명으로 개종하려는 교육, 신앙, 언어, 관습의 개조가 과오였음을 정중히 사과하는 성명서를 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전통문화냐 근대문화냐 하는 양자 선택론의 비지성적 논쟁은 사라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아니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를 근대주의론과 발전론을 앞세워 얼마나 많이 섣부르게 지우고 부수고 버려 왔는지 이제는 성찰 할 시대가 온 것입니다.
5년 전 필자가 경기문화재단에서 잠시 근무 할 적에 수원 모 문화 기획팀에서 추진하려 했던 수원 화성시전면복원사업의 프로젝트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화성시를 과거 정조시대 계획도시로 전면 복원하자는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도시근대화를 추진하던 때는 언제고 몇 십 년도 안돼서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시멘트 빌딩과 시민의 주거지를 모두 다 소개하고 옛집으로 짓는다는 야심찬 문화산업 프로젝트입니다. 한국적 근대도시건설은 2~3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수립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예입니다. 외국 관광객이 서울에 가면 서울의 오랜 정체성이 없다는 푸념을 그들에게서 들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역문화의 근대성은 식민지와 전쟁과 재건을 거치면서 전통의 자학적 청산주의에서 시작했습니다. 청산은 청산의 악순환을 부르는 반문화적 행위입니다.
(수원의 화성은 조선시대 정조대왕 시절 문예부흥의 결정체였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로 평가 받는 이 도시는 우리 민족이 바라던 도시 정체성을 잘 들어내 준다. 6.25 전쟁 후 파괴되고 섣부른 근대개발주의로 화성시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 생태문화와 역사관광이 살아 있는 옛 그대로의 화성시로 복원하려는 대형문화프로젝트가 제언 된 바가 있지만 바꿔버린 근대도시화로 이제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그림은 정조시대 도시설계지도그림인 화성전도를 내용을 보충하여 재편집한 그림. 2005 실학축전 디자인)
지역문화의 근대성
식민지와 전쟁으로 신산고초를 겪지만 한국문화의 근대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성취하고 있습니다. 산업문화와 민주문화입니다. 전자는 물질적 성장과 발전에 따른 대도시 밀집주거문화로 나타났고 후자는 인간과 사회의 근대성 성취로 마당과 사랑방, 그리고 광장문화양식으로 나타납니다.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혜택을 전쟁의 잿더미에서 빠르게 성취했던 한국민은 한국적 근대문화라는 독특한 산업사회문화를 형성해 왔습니다. 반면에 봉건적 전통과 식민지적 유산과 압축성장에 따른 소외와 억압에 저항하는 민주화 과정은 한국만의 독특한 민주시민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산업문화와 민주문화는 한국근대문화의 양대 산맥으로 지역문화에서도 내포개념이며 진행형 문화입니다.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산업화에 따른 독특한 대중문화시장의 출현입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대량으로 보급되는 대량 소비문화 성격인 대중문화는 문화의 대량 생산과 소비라는 새로운 문화패턴을 만들고 강력한 영향력을 만들어 왔습니다. 대중예술 스타 탄생으로 산업물과 대중문화의 상품성을 높이고 시장 구매력을 촉매하며 시장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져 다 줍니다.
그러나 지역에서 대중문화는 향토문화의 위축을 가져다주며 전일적인 시장지배가 커지면서 지역적 정체성의 감퇴와 문화적 자아의 상실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지역문화의 공익성, 정체성의 침해로부터 지역문화의 자아 찾기를 어떻게 구현 할 것인가는 시급한 정책적 과제입니다. 토종과 원형적 삶의 문화의 보고인 지역문화 정체성 없이 한국문화 정체성도 없으며 매스미디어 기술과 영상미에 의존하는 한류의 부박함을 보완할 길도 없습니다.
반면 대중문화의 순기능도 있습니다. 지역산업에 활력을 주고 지역문화를 독자적인 지역산업 브랜드로 육성하기 위한 지역산업 활성화 전략으로 축제나, 대중문화행사로 펼치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유행과 일시적 효과가 아닌 성숙한 지역문화의 중심을 가지고 대중문화의 지역적 업그레이드가 요구됩니다. 정체성과 효과성 사이에서 문화정책적 선택은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경우 효과가 늦더라도 자생적 역량을 육성하는 장기적인 지역문화정책이 필요하고 또 어느 경우에는 단기간에 효과적인 대중문화적 사업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대중문화는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살리는 방향에서 수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역문화의 근대성은 지역정신의 내면화와 개성화로 들어나는 것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시대에는 지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생활정치와 생활문화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복지 노동 교육 문화를 하나의 시민생활정책으로 하는 복합지역문화공간사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각 동, 면, 읍의 사무소를 개방형 시민생활문화쎈타로 운영하며 거기서 복지, 고용,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생활정치와 생활문화일 것입니다.
(한국문화의 특성은 전통과 근대와 탈근대성의 공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좌측부터 전통적 농촌문화, 근대도시의 청년광장문화, 생태영성 가치를 새로운 대안으로 하는 미래문화
지역문화의 탈근대성)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가르는 준거는 다원성과 문명적 성찰입니다. 근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 극대화의 진로를 택하여 산업화 도시화를 일반적인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정보화시대에 진입하면서 지금까지의 생산력주의에 대한 반성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까지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금 펼쳐 논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깊은 성찰 없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도 보장 받기 어렵고 지구생태계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인 만큼 문화정책의 방향도 수정이 불가피한 시대입니다. 문화는 특수한 전문분야이거나 여가나 산업의 부수적 개념이 아니고 모든 정책에 요구 된 시대인 것입니다.
특히 한국은 압축형 근대주의와 이념적 보혁갈등으로 피로감이 큽니다. 한국의 근대화는 자발성의 취약, 근대의 성장동력의 문화가치 부재로 인해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시민적 자발성으로 이루어지는 광장문화도 2000년대 들어와 월드컵 시민응원에 와서야 겨우 가능했습니다. 자발성 없이 지역문화 없고 지역성 없이 국민적 활력을 다시 일으킬 수 없습니다. 쓰라린 자책이지만 모방 근대주의, 전통에 대한 청산주의로 지역의 자발성은 크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문화적 자부심 없는 시민으로는 선진국 진입도 국격도 갖추기 어렵습니다. 그로칼리즘(그로발리즘+로칼리즘) 시대입니다. 지역이 지역 나름의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브랜드를 높여야 지역 경제도 문화도 살 수 있습니다.
지역도시의 디자인은 모방근대주의로 도시의 정체성을 담고 있지 못한 경우가 흔히 나타납니다. 광장은 도시 디자인의 핵심인데 토건사업으로 채우는 디자인할 것이 아니고 시민의 자발적 기획과 참여와 창의적 소통의 장이 되도록 광장의 중심을 어떤 식으로 비워 놓는가가 핵심입니다. 탈근대적 정서를 가지게 되는 시민에게는 ‘비움의 디자인’이 중요해집니다. 비워두는 공간, 숲과 공원과 마당과 광장은 도시의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향후 문화는 전화기를 맞아서 문화 갈등이 심화 되고 복잡화하는 혼돈의 시대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런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근대문화의 주체적인 완성과 정체성 있는 탈근대문화의 대안창조입니다. 중심을 갖고 활력 있고 창조적인 문화예술의 흐름을 잡아나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근대적 행동규범의 외적 제안이 시민들의 내적인 생각을 규정 지울 수는 있었어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행동을 창조하는 시민이 많아지고 그 문화행동을 권장하고 지원하는 사회분위기가 있어야 창조적인 문화사회층도 만들어 냅니다.
창조문화란 선진기술의 도입과 재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전통의 모방과 재현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문화의 도입과 재현을 마구잡이로 하면서 문화교육과 행정관리로 유지되고 문화관료주의가 양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지역마다 옥상옥의 무수한 문화관련 시설들이 문화기획과 생산과 유통까지 담당하려는 과욕은 도리어 문화의 자생성을 억제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은 자신이 낸 세금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는 수동적 문화수용자에 머물게 된다면 문화는 활력을 잃어버립니다.
문화는 자율성과 창의성이 있어야 활력을 가집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문화 정책자들은 끝까지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근대문화는 전통시대 문화와 다르게 자신의 내적 성찰과 자기 내면화로 변화하는 외적 조건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자기화의 포태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개성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면화와 개성화는 근대문화의 필요조건입니다. 자율성과 창의성이 조성되는 기반 조성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투자하고 지역문화예술인에게 공간 운영의 기회를 주고 일자리를 주는 것이 문화기반조성입니다. 문화시설을 만들어 행정관료들이 자리를 차지한다면 타율성에 젖어서 문화의 활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근대시민문화의 성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데 한국문화는 탈근대화의 이중적 과제까지 안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충돌이 극심하여 사회적 혼란은 만성화 됩니다.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안, 새만금방제건설, 금정산 터널, 골프장 유치사업 등등 크고 작은 건설사업 현안에는 미래사회에 대한 비젼의 출동이 끊임이 없습니다. 이는 문화의 충돌에 다름 아닙니다.
(마을 안에서도 문화가치의 충돌은 상시적이다. 이를 오히려 상호 견제와 긴장관계로 활용하면서 공존의 지혜가 필요하다.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마을 노인들의 장승굿, 지역 여성들이 탈근대문화를 모색하는 문화행사.)
전통성과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화적 다중성
탈근대성은 근대의 산업화와 후기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는 시대정신이고 앞으로도 시민적 합의가 필요한 과제입니다. 한국은 근대성의 완성도 채 이루지 못하고 탈근대성 찾기도 미룰 수 없는 다중적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거기다 지역문화는 비서구적 특징인 전통적 무형문화까지 현재형으로 가지고 있고 문화종 다양성의 마지막 보루 같은 원형문화지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특징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문화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절풍속이나 전통적 통과의례문화가 있어서 아직도 민족명절 대이동으로 이어오며 혈연적 공동체 문화의 순기능도 작동합니다. 농촌지역은 도시적 근대문화의 수혜를 받고자 하는 근대의 마지막 수용지가 되고 있습니다. 농촌이 공장지대로 점점 바뀌고 농사로 생존이 어려운 농부들은 업종을 뒤늦게 바꿔야 하는 혼란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단일 정책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한 일대 혼란입니다.
어째든 한국문화의 특징을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외형적으로는 근대문화를, 내면적으로는 전통문화와 탈근대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대간, 교육층위간, 직업간에 따라서 전통과 근대와 탈근대성 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고 이중적 모순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중모순은 정책적으로도 표출됩니다. 지방과 중앙의 동반성장, 개발보존, 녹색성장 등 형용적 모순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건설논란 등도 이 시대 문화가치의 다중적 흐름이 반영된 것입니다. 서로 자기 문화가치가 옳다는 것인데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신념, 문화기치와 세계관의 문제까지 관련되어 있어서 국토는 한정되어 있는데 아주 다른 정책안들로 출동합니다. 이렇게 한 나라 국민, 한 지역민이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의식으로 성장하여 거대한 세력화로 나타난 것이 한국근대문화의 특징입니다.
금융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세계시장에 노출된 개방경제시대에 수출과 금융자본으로 세계시장을 상대하는 대도시 시민층과 지역자립과 내수시장으로 생존하는 지역시민층은 문화적 가치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가치적 측면에서도 대도시문화권과 지역문화권의 공생적 문화정책이 필요하며, 산업화세력(노인층), 민주화세력(장년층), 탈근대세력(청년층)의 3분화한 다층문화화 양상을 서로 인정하는 문화정책이 요구 됩니다. 이것은 현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공존하자는 수동적 차원이 아니고 이종교배를 통해 우성 문화종을 창조하려는 역동적 문화창조 전략으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 청년은 민주화와 사업화를 동시에 혜택 받은 새로운 문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2005년 8.15경축 행사에서 )
모든 정책구현은 문화가치의 선택
이처럼 한국지역문화는 중층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민의로 수렴하는 의회정치가 다양성이 공존하는 토론장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어떻게 정책으로 반영할 것인가는 선택과 집중의 과제입니다. 민의에 따르고 민의를 반영하고 민의를 선도해야 하는 정치적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문화는 서로 다름을 수렴하고 승화시키는 힘이 있음으로 대극을 통합하는 중심가치를 찾아서 정책과제로 발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상투적이고 계몽적인 문화행사보다 심층적이고 감동이 있는, 그래서 숭고한 가치를 창조하는 지역문화예술 사업이 필요한 때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문화의 깊은 이해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정책의 선택 자체가 감동 있는 문화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삶의 가치를 감동 있는 문화정책으로 입안하고 반영할 것인가? 위에서 설명한 지방문화의 제반 특성 중 생활성, 전통성, 향토성, 시대성 / 전통성, 근대성, 탈근대성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문화예술사업으로 지원할 것인가는 정치인의 철학의 문제이고 문화의식의 문제입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에서 민심 파악의 20% 가까이 오차가 생긴 것도 ‘비밀의 민심’을 읽지 못한 결과라고 말들 합니다. 숨은 민의는 심층문화의 이해 없이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심층문화는 보이는 문화가 아니고 집단무의식, 인간본성이 발현하는 문화형식, 문화원형에 보다 가까운 영역으로 정치인은 이성주의와 이데올로기로, 그리고 지역주의와 네거티브 선거전략으로 민의를 파악하려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음을 이번 선거에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대는 민의가 통계적 사고로 파악되지 않고 직관적 정서적 사고로 파악되는, 즉 문화의 이해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민의를 읽지 못하면 정치인도 생존할 수 없는 바야흐로 문화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심층문화를 모르면 당연히 ‘민심이 무섭다’는 말이 나올 만합니다. 모르는 길은 앞이 캄캄하고 무섭기 마련입니다. 사회적 질서가 불안하고 어둑할수록 밑바닥에 흐르는 본성의 질서, 합리적 이성문화 뒤에 숨은 정서문화, 감성와 욕망(리비도), 그리고 영성의 혼돈적 질서를 이해하고 이를 성숙한 사회질서의 에너지로 끌어 올리는 것은 지역정책을 입안하는데 선택이 아니라 필수 입니다.
(예술은 분별지의 질서를 버리고 떠나 무분별지, 혼돈 속으로 들어가
새 질서를 구현하는 야생의 사고, 정서적 지성의 길입니다.)
예술, 그 무분별지의 분별
예술을 말하기 앞서 창조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과학과 예술, 의 창조란 찬란한 빛의 계승에서만 오는 줄 아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패와 좌절이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는 것처럼 좌절한 어두운 혼돈 속에서 새 질서를 갈망하며 출현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특히 예술창조는 어두운 혼돈 속 ‘창조의 구멍’으로부터 나온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별이 빛에서 만들어지기보다 블랙 홀에서 출현하듯 말입니다.
문화는 삶의 양식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그와 좀 다릅니다. ‘예술이 삶의 미적 표현방식이다’는 이야기는 흔히 하는 이야기입니다. 미적 표현방식이 근대에 와서 지나치게 세분화하고 기능화합니다만, 근대적 교육제도가 분류한 생산자 중심의 장르 중심주의는 탈 근대적 문화변동기를 맞아 수요자 중심으로 재편되어가고 있습니다. 시민의 생활문화적 욕구가 커지고 문화예술치유의 실용성이 날로 높아지면서 예술 쟝르주의 생산은 수요가 줄고 다시 쟝르의 해체, 재편성, 통섭이 나타납니다. 수요자 중심의 삶의 문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통섭이란 서로 끌어 당겨서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하는 것인데 인문학과 과학기술과 예술의 통섭 현상도 나타납니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컴퓨팅이 그 기능을 선도합니다. 최근 어느 지역도시가 유비쿼터스 신도시를 개발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이 때 통섭을 선도하는 핵심적 힘을 저는 예술에서 찾습니다. 감성 없는 메마른 이성주의 문화에 식상한 현대인들은 예술감성과 생태영성에서 만족과 평화를 찾으려 합니다. 감성이란 다 아시는 대로 오감의 현상을 나타내게 하는 육신화된 마음이라면 영성은 이성으로 기술할 수만도 없는 감성의 내재적 세계 같습니다. 예술인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해하자면 그렇습니다. 서구에서 1960대말부터 일어났던 히피, 반전평화운동, 뉴에이지 문화운동에서 후기 산업사회의 세기말적 흐름은 이미 감지됩니다. 한국에서도 탈근대성을 갈망하는 젊은이들 문화에서 집단지성, 감성, 영성의 흐름은 벌써 감지됩니다. 막연한 물밑흐름이 아니라 점점 현실로의 노출 정도가 심합니다. 광장은 이미 젊은이들의 정서의 표현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단순히 스포츠 응원문화나 정치적 의사표현 집회가 아니라 사회적 주장과 자기 감성의 표현과 문화 나눔을 즐기려는 분위기가 혼재하여 나타납니다. 청년 여성이 문화를 주도하는 혼돈과 새 질서의 역동성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새로운 문화창조 에너지를 충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집단적으로 분출되는 정서적 지성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집단지성은 정서적 지성으로 나타납니다. 세계생명문화포럼에서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모여서 개막굿으로 여신신화의례를 펼치고 있다. 2005세계생명문화포럼 개막행사)
지역문화예술사업의침체
이런 진단에서 볼 때 지금까지 지역문화예술 사업은 무엇인가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역문화예술사업이 하드웨어 중심인 지원사업으로는 얼마 못 가서 운영주체의 부실로 텅 빈 공간이 되는 경우가 많고 소프트웨어의 질을 높이자면서 대도시의 문화예술 전문인사들이 컨설턴트 한 프로그램의 적용은 지역실정을 모르는 아이디어백화점이 되고 현실에 착근을 못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지역사회에 뿌리를 못 내리는 이벤트성에 그치는 문화사업의 실패 사례는 너무 흔한 실정입니다. 길게 보고 사람에 투자하는 노력, 짝퉁 프로그램이 아니고 개성과 창의성 있는 프로그램부터 육성해야 할 것입니다. 지역문화예술사업 정착과 성공의 핵심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구축보다 그 지역에서 주민과 함께 살며 생존하는 창조적 문화예술인을 세우느냐 아니냐가 핵심입니다. 문화는 아파트건설 사업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특히 ‘정서적 지성’사업입니다. 지역문화예술사업의 문화주체를 바로 찾고 사람을 지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사업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사람을 믿고 기다리고 지원하는 지역문화인 육성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문화예술정책의 하향적 지원이나 아이디어 카피식 프로그램 제공에는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처음부터 시민이 기획의 주최가 되는 사업을 지원하고 광역지역보다 마을에서 시작하고, 대규모 문화공간보다 주민생활형 문화사업을 우선 지원하는 방향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예를 들어 아껴 쓰고 바꿔 쓰고 나눠 쓰는 동네시장에 수공예품장터, 읍면동의 복합문화공간을 시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보장하는 것, 명백하고 시급한 지역문화정체성 보존육성사업, 주민의 경제적 소득향상에 도움이 되는 농산품 직거래형 향토문화장터, 생활체육과 건강문화를 융합한 생활문화사업들이 당장 떠오릅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역민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이 자기 지역문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중심의 새마을 운동(경제운동), 근대적 이성만능주의(교육문화), 영혼독점주의의 오만(종교사업)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을은 영혼 없는 마을이 되었고 지역은 정체성 상실한 짝퉁 근대문화의 온상이 되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역은 마을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연집합입니다. 마을문화의 부활 없이는 지역문화예술의 침체 늪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입니다. 산골의 냇물을 맑게 해야 강물도 맑아지는 이치입니다.
(마을문화 살리기에 힘을 쓰는 귀촌 예술인들이 요즘 부쩍 많아지고 있다. 청소년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지역 예술인과 지역의 작은 미술관(오랜미래신화미술관))
청년, 여성의 정서적 지성문화
예술이란 인간 삶의 감성형식이면서 근대주의, 즉 이성적 합리주의로 잘 잡히지 않는 집단무의식, 혼돈의 세계와 관련이 깊습니다. 합리적 지성이 정치경제를 이끈다면 정서적 지성은 예술, 종교, 놀이, 인문학을 관통합니다. 이들은 신석기 신화시대부터 같은 뿌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신화와 의례와 상징과 놀이가 모두 같은 직관적 문화유산입니다. 정치경제가 그 시대 사회적 질서의 문제를 푸는 범주라면 예술과 인문(文史哲)과 종교는 본성의 질서를 탐구하고 표출하는 범주입니다. 사회적 질서가 이성적이고 과학적 합리주의를 추구해 왔다면, 본성의 질서는 통계적· 수리적 이성으로 잘 잡히지 않는 생명과 무생명계의 보이지 않는 질서입니다. 그러다가 사회적 질서가 혼란에 빠지거나 해답을 구하지 못할 때 인류는 예감과 영성을 감지하는 본성적 질서에서 답을 찾아 왔습니다.
예술인이나 예술적인 인간은 물질주의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본성적 질서의 문을 두드리는 자입니다. 그 어두운 블랙홀을 기웃거리고 푹 빠져버리기도 하는 엉뚱한 자, 사회적 낙오자 같은 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들을 주목하고 투자를 하는 게 향후 문화시대 문화예술사업의 핵심입니다. 예술가는 새로운 문화창조의 주된 동력이고 서로를 끌어 당겨 고양시킨다는 통섭의 매개자일 것입니다. 과학기술과 인문학과 시장경제를 질적으로 고양시키는 증강현실의 매개자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술은 잘 몰라서 … .” 하는 식으로는 앞으로 정치를 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신세대의 정치적 동력에 정치권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4,50대 민주화운동 시대 경험을 가진 세대가 옳고 그름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세대와는 달리 민주화와 산업화의 혜택을 받고 성장한 2,30대 신세대는 자신의 좋고 싫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감성적 지성의 세대입니다. 이 세대의 정치풍향은 이념적 판단이 아니라 문화적 판단에서 나옵니다. 앞으로 한국의 창조적 문화 동력은 여기서 나올 것입니다. 중간 사회집단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의사와 감정 표출을 좋아하는 세대입니다. 정당이나 노조나 단체나 기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트위터나 인터넷 ‘아고라’나 페이스북이나 불로거 카페로 자기 언론을 가지는 인류 최초의 지성적 다중이 등장하는 세대입니다.
이들의 즉각적 표현은 예산을 기껏 세워 올린 문화시스템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관료적 행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하며 간섭 받고 감시 받는 공간의 구속을 싫어합니다. 이제 지역문화예술사업은 청년, 여성의 정서적 지성에 주목하고 투자 할 때입니다. 그들의 창조적 지성을 신뢰하고 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이 지역문화예술의 사활에 관한 일입니다.
(앞으로 지역문화의 사활은 청년과 여성의 자기 창조문화를 만드는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의 여성들이 지역문화회를 만들어 행사를 하고 있다.)
지역문화예술사업의 성공적 방향 모색(주2)
예술과 정치, 예술과 경제, 예술과 사회, 예술과 교육 등 전 영역에서 희망과 환상의 세계가 있어야 그 사회는 창조의 동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술은 이제 좁은 의미의 근대적 쟝르주의 예술이 아니라 예술인류학, 예술사회학, 예술심리학, 예술치료학, 문화복지학, 문화경제학 등의 연구가 활발한 것이 말해주고 있듯이 감성적 지성문화 전반을 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의 영역과 역할은 아주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학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성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예술이기에 컴퓨팅을 매개로 삶의 각 분야를 통섭해 들어 갈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술은 미적 기술학습, 예술수양, 예술정서 함양 교육, 대안사회의 모델, 치유문화, 광고예술학과 프로그램의 기획 영역으로 새롭게 분화되기도 하고 통섭되기도 합니다.
문화적 판단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정치 사회 시장의 판단 기준도 옳고 그름이 아니고 좋고 싫음의 정서적 판단이 작동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자아 성취, 행복감을 찾아서 삶의 양식을 재구성하려는 문화적 욕구는 점점 더 청년, 여성층이 주도해 나갑니다.
주2) 이 글은 ‘지역문화예술 사업의 성공적 방향모색’ 보충설명으로 지역문화예술 활동가 이상훈님의 글을 전제함.
<관광과 문화예술의 차이>
지역문화예술사업에서 관광과 예술을 구분해서 이해했으면 합니다. 관광산업을 예술산업과 혼돈해서 이해를 하면 지역의 모든 축제들이 예술사업들과 동일시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현재 지역문화예술사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관광문화사업만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관광문화사업에 집착하는 이유는 경제성의 논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문화예술, 순수예술사업은 투자의 영역입니다. 문화예술에 경제의 잣대, 수익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지역문화예술은 소위 수도권문화예술의 재현장이 되거나 수입처가 되고 맙니다. 지역 문화예술사업은 그야말로 지역문화예술인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이 자기 지역을 떠나지 않고 지역의 정체성을 끌어안고 자신들의 창작물에 구현해 낼 수 있도록 투자해야 합니다. 지역예술 창작물은 지역의 공공문화자산입니다. 여기에 작가들이 편하게 난장을, 한판 문화의 난장판을 벌일 수 있는 문화예술사업- 예술축제가 존재한다면 좋겠습니다.
<지역 문화공간>
문화예술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소위 대규모 공연장이나 시설을 지어놓고 지역 문화예술에 대해 모든 것을 다 해 줬다는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대규모 공연장은 도리어 지역문화예술활동에 제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대규모공연장은 수도권문화예술공연의 재현장소로 활용되는 정도이거나 대중문화의 소비의 장이 되고 맙니다. 지역 문화예술사업의 방향은 소규모이면서도 복합적인 생활문화공간의 창출에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는 복합문화공간, 이런 공간의 활용에 다양성을 부여한다면 여러 가지 역할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지역 작가들에게는 문화예술창작의 공간이면서 지역 어린이들에게는 작은 도서관이고 지역 주부들에게는 ‘수다방’이 되고 지역 학생들에게는 독서실이 되는것입니다.
지역의 문화를 찾아내고(지역 문화기행, 우리지역 바로알기 등), 지역의 문화를 전파하고(지역문화기행, 문화학교), 지역의 문화를 생성해내는(다양한 문화예술체험 발굴, 동네축제 구현), 그래서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에서 예술가와 어린이와 주부와 학생, 그리고 어르신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모여 동네잔치를 벌일 수 있는 그런 문화공간의 창출이 지역문화예술의 실체적 힘이 될 것입니다.
<지역예술가들에 대한 신뢰>
지역문화예술사업에 지역예술가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가지 않으니까? 나름대로 제법 그럴싸한 이벤트회사나 기획사가 훨씬 믿음이 가나 봅니다. 그래도 그들은 법인사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이 정답일까요? ‘지원은 하되 간섭을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원 자체가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관제문화가 주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관제행사를 치루자면 시군단위 읍면동장님들과 이장, 반장님들을 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런 행사는 그야말로 관제행사입니다. 자발성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지역문화예술가와 문화예술기획자들을 믿고 지원한다면 처음 한 두 번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업을 해 나갈수록 훨씬 알차고 구체적인 일들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의 문화공간들에 대한 운영도 지역문화예술가(단체)들에게 위탁운영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입니다. 죽어있는 공간, 침체되는 지역에 문화예술가들이 작업장을 열면서 다시 활력이 넘치고 지역경제가 되살아났다는 사례는 국내에서도 이미 많이 있습니다. 문화예술의 힘은 이런 것입니다. 암에 걸린 듯이 죽어가는 지역사회를 다시 활기찬 동네로 만들어 내는, 피가 돌아가는 동네로 변화시키는 문화예술의 힘은 곧 지역주민들의 삶의 활력이고 재생산의 근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술 지원에 대해>
문화예술에 가장 높은 비용은 작업비용(창작비용)입니다. 하지만 보통 작업비용(창작비용)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전시비용, 공연비용에 지원을 합니다. 이런 지원방식은 많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발표에 대한 비용만 지원하다보니 창작과정이 소홀해 지고 관례적인 발표과정만이 남게 됩니다. 문화예술창작활동의 지원은 창작전체에 대한 지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술에 대한 지원은 그 결과가 창작물로만 나타나지 않고 발표되는 순간 공동체전체의 문화적 울림으로 작용합니다. 예술창작물은 우리가 집에 가구하나 장만하고, 냉장고 들여다 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창작물은 생성되는 순간 문화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성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작가들의 창작에 지원하는 것은 공장에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에 지원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이 개인에 대한 지원이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문화예술가들의 작품은 개인적인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만약 개인적이 소유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답이 나온다면 응당 작가에 대한 지원은 창작전체에 대한 지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은 산업시대나 지식정보화 시대라고 하기도 적합하지 않고 시민이 정서적 지성을 가진 문화의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습니다. 지역문화예술사업은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생태적 지성문화의 거처, 원형문화의 발신처, 여가와 고향문화로서의 마을문화 재창조, 문화치유를 갈망하는 대도시 시민의 모성문화 역할 등 새로운 지역문화예술 사업이 준비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의 요지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1. 문화의 심층적 이해와 해석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특히 지역문화는 문화원형 토종기술과 생태의 본류지입니다.
2. 지역 생태종 다양성과 함께 조응해 온 지역 문화종 다양성(토종)의 연구와 보존과 학습, 재현과 재창조 등은 지역문화의 공공문화자산입니다.
3. 전통, 근대, 탈근대문화가 공존하는 평화적 공생문화입니다. 거기다 이주민 문화유입까지 있어 문화다원성을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며 다문화공생의 문화정책이 필요합니다.
4. 이념갈등, 경제적 양극화 심화, 탈근대적인 문명전환적 위기는 문화적으로는 대혼돈기를 말합니다. 혼돈을 인정하고 혼돈 속에서 공생의 새 질서를 모색하는 문화적 주체의 관용과 융합의 문화 지도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5. 지역적 정서형식을 갖춘 예술가에게 우선 지원하여 자생적 문화가 뿌리 내리는 것이 지역문화 활성화의 첩경입니다. 토착적 문화활동이 살아나도록 복합문화공관을 지역예술가와 시민단체가 자율적으로 운영 할 수 있도록 생활문화정책 수립이 필요합니다.
6. 청년, 여성의 ‘정서적 지성’을 주목하며 새로운 문화 동력을 추동 할 수 있도록 시민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문화프로그램을 지원합니다.
7. 생태영성, 행복과 평화가치, 창조적 삶의 문화, 문화치유 사업 등 삶의 질을 향상하는 생활문화를 우선 지원하는 장기적 안목의 문화정책이 필요합니다.
8. 인문, 과학기술, 예술, 산업 등의 통섭형 사업- 즉 미디어 문화예술과 아날로그식 전통문예와 인문학이 통섭하는 복합문화예술사업, 문화예술과 지역경제의 협동사업 등 지역적 처지에 맞는 지역문화사업의 새로운 기반 조성 등이 필요합니다.
9. 지역 예술인들의 지역문화복지제도와 예술은행 등의 사회안전망 구축이 필요합니다.
10. 문화부문 인사정책에 민간 문화예술의 개방형 직위제를 도입하여 이들 주도의 지역문화정책을 펼쳐질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문화예술의 최고 전문가는 이들입니다.
6. 청년, 여성의 ‘정서적 지성’을 주목하며 새로운 문화 동력을 추동 할 수 있도록 시민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문화프로그램을 지원합니다.
7. 생태영성, 행복과 평화가치, 창조적 삶의 문화, 문화치유 사업 등 삶의 질을 향상하는 생활문화를 우선 지원하는 장기적 안목의 문화정책이 필요합니다.
8. 인문, 과학기술, 예술, 산업 등의 통섭형 사업- 즉 미디어 문화예술과 아날로그식 전통문예와 인문학이 통섭하는 복합문화예술사업, 문화예술과 지역경제의 협동사업 등 지역적 처지에 맞는 지역문화사업의 새로운 기반 조성 등이 필요합니다.
9. 지역 예술인들의 지역문화복지제도와 예술은행 등의 사회안전망 구축이 필요합니다.
10. 문화부문 인사정책에 민간 문화예술의 개방형 직위제를 도입하여 이들 주도의 지역문화정책을 펼쳐질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문화예술의 최고 전문가는 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강조하고 싶습니다. 문화원형(토종)의 보호육성, 청년과 여성 중심의 정서적 지성문화 조성, 창조적 대안을 가진 지역문화예술사업의 공공성에 지원 등을 지역문화예술사업의 3대 화두로 제언하며 이상으로 마칩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문화시대의 시민적 욕구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제 시민의 자발성에 기초한 창조적 대안문화를 통해 국가적 침체의 벽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오랜미래> 회화 120호. 1995년작 김봉준 작)
이 글은 2010년 6.2 지방선거로 선출된 지방의원 국회 연수원에서 발표한 강연 원고입니다.
출처: http://www.mafm.kr/board/board.php?b_id=shinhwa&page=0&cate=&eq1=&eq2=&eq3=&eq4=&eq5=&st=&sk=&cmd=view&num=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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